<화제의 여성>-「닥종이 인형」으로 명성-10년만에 귀국 전 김영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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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막 밭에서 돌아온 듯 헝클어진 머리채로 삼베적삼 앞섶을 풀어헤치고 어린 아들에게 젖을 물리고있는 모자인형. 78년 납작한 코와 통통한 뺨을 지닌 작은 눈의 인형들을 토속적 생활의 때를 묻혀 내놓음으로써 서양인형에만 길들여져 있던 우리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안겨줬던 「닥종이 인형작가」김영희씨(46)가 10년만에 독일에서 돌아와 귀국전(9월4∼16일·조선일보미술관)을 갖는다.
그는 81년 독일 뮌헨시립박물관 초대전이후 독일에 머무르면서 40여회의 전시회를 가지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여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번 전시회는 금의환향이 되는 셈.
지난 7월말 서울에 도착한 이후 계속 경기도 벽제의 촌가에 머무르면서 출품작을 손질하고 있는 그는 『삼복더위 속에서 하루종일작품과 씨름하고 있지만 황홀하기만 하다』며 웃는다.
그의 인형은 우리나라 고유의 닥나무로 만든 한지의 일종인 닥종이를 재료로 한 것.
닥종이를 물에 촉촉히 적셔 뭉치를 만드는데서 부터 작업은 시작된다. 닥종이에 쌀풀을 발라 형태를 만든 다음 얼굴은 종이를 얇게 퍼 만든다. 동양화염료에 아교를 타서 염색한다. 종이를 뜯어 붙여 가볍게 홍조를 떤 통통한 볼을 만들어 낸다.
독일에 건너가기 전까지는 지초·밤(율)·쑥 등 자연염료로 삼베에 물을 들여 인형들의 옷을 해 입혔으나 최근에 와서는 옷도 일일이 물들인 종이를 콜라주처럼 뜯어 붙여 형태를 만들어주거나 종이 옷으로 만들어 입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독일에서 작업하는 동안 내내 한국에 있는 오빠가 닥종이를 부쳐주셨어요. 일본종이는 그곳에도 다량으로 수입돼 있었지만 자존심이 상해 사용하기 싫었고 또 손으로 만든 우리종이만큼 제작품의 효과를 얻어낼 수도 없을 것 같아 일본 종이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재료문제보다 그의 독일생활에 더 큰 부담이 됐던 것은 언어문제. 그러나 이 또한 한번 매달리면 끝까지 매달리는 그의 성격 때문에 열심히 독일어를 익혀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은 뼛속 깊이 저려오는 「영혼의 외로움」. 독일전역은 물론, 네덜란드·프랑스·스웨덴·스페인·스위스 등 유럽 여러 곳에서 전시회를 열며 미처 유럽인들이 생각해내지 못했던 기법으로 인형을 통해 꾸밈없는 소박한 삶을 표출해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왜 여기서 사는가」하는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외로움을 느꼈다고 그는 고백한다. 『세계적 작가가 되겠다』는 그의 야무진 결심도, 매일 8시간씩 작업시간을 정해놓고 자신을 채찍질해도,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오니 너무 좋아요. 「내 땅」이란 것을 만끽하기 위해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돌아다녀요. 그 때문인지 독일에서 시름시름 앓던 범들도 깨끗이 나아버렸어요.』 그는 이번에 인형 60점과 회화작품 40∼50여점을 선보일 계획. 홍익대조각과 출신답게 회화작품도 종이를 콜라주 해 부조처럼 입체감을 살린 것들이다.
81년 독일에서 재혼한 독일인 남편과 슬하의 다섯 자녀 등 일곱 식구가 모처럼 한국나들이를 해 한국의 관람객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홍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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