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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고고학 학술 대회-바이칼 유적 탐사 큰 보람|서울대 고고학과 이선복 교수 참가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소련 시베리아 지방의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지난 7월23일∼8월11일 국제 고고학 학술 대회가 열렸다. 이 학술 대회에 참가하고 이어 시베리아 지방의 유적 답사를 마치고 최근 귀국한 서울대 이선복 교수 (고고학)의 대회 참가·유적 탐사기를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주】
이 대회는 작년 여름 미국 시애틀에서 열렸던 환태평양 지역 고고학 학술 대회에서 대회의 골격이 가다듬어졌으며 내년에 북경에서 개최되는 INQUA (국제 제4기 학회) 총회에 앞서 아시아 및 아메리카의 구석기 고고학 연구 현황을 점검하고 당면 현안에 대한 결의안 채택을 목적으로 조직됐다.
70여명의 외국인 및 1백30여명의 소련 학자가 참석한 이 대회는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큰 국제 학술 대회였다.
국내에서는 정영화·황용운·최무장·노혁진·이융조·필자 등 학자 6명과 대학원생 5명 등 모두 11명이 참가했다.
이번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91년 북경 INQUA대회 이전 국제 제4기 학회 안에 구석기 지질학 위원회 설치 ▲유라시아·북미 대륙의 구석기 연구에 있어 지역적 연구의 협력강화 ▲이번 대회와 같은 형식의 학술 대회 ◆5년 이내에 다시 개최할 것 등 세가지.
비록 국제적 모임에 대한 주최측의 경험 부족과 소련 사회의 여러 고질적 문제로 진행상 실수가 있기는 했으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의 주제와 토론 내용은 다양했으며 각지에서의 새로운 유적조사결과에 대한 토론 역시 매우 흥미 있는 것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특히 구석기시대 전기에서의 찍개 문화권 개념의 유효성문제, 무스테리안 문화의 개념과 분포의 범위문제 및 시베리아 최초의 인류서식의 증거와 미 대륙으로의 인간이주시기문제에 대하여 진지한 의견 교환을 하였다. 이들 각 문제에 대한 일치된 결론은 물론 모아질 수 없었으나 그동안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소련 고고학계의 연구시각과 방법론 및 주요관심 연구주제에 대하여 외국에서 참가한 학자들은 많은 점을 알게 되었으며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이번 학술 대회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적 경계선으로 여겨지던 예니세이강의 경계 개념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비판적 견해를 보인 점, 2백50만∼3백20만년 전의 시베리아 디링가 유적의 실체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 점등은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또한 석기제작·사용에 있어 기술적으로 동북아시아에는 공통점이 많으며 후기구석기의 시베리아-한국-중국-일본 지역은 쐐기형 석핵에서 공통점이 확인된다는 것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통된 견해를 보인 부분이다.
심포지엄이 끝난 다음 필자 일행을 포함한 외국인 26명은 이르쿠츠크로 가 이후 약 보름동안 바이칼 지방의 각종 유적을 답사했다. 1,000㎞ 이상에 달하는 거리를 낡은 버스로 움직이며 주로 캠프장에서 생활했다. 4명의 일본인학자가 피로와 부상 및 발병으로 중도 탈락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는 50여명의 소련인 학자와 학생 및 기타인원이 합류하여 이후 계속 행동을 같이 했다.
바이칼호의 연안에는 중석기·신석기·청동기 및 역사 시대의 유적이 다량 존재한다고 하는데, 우리일행은 단지 네군데 유적만을 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캠핑장 옆의 언덕마루에는 청동기시대 석관묘가 몇기 복원된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으며 한 묘곽의 내부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시베리아의 고고학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바이칼 연안에서는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유구를 현장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들 고고학 자료들은 우리 선사시대의 것들과 매우 상이한 양상이었다. 또한 이르쿠츠크에 돌아와 관찰한 각지로부터의 자료 역시 우리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한민족의 「원류」가 바이칼 지방에 있다는 생각은 중앙아시아나 몽고에 원류가 있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됐다.
필자는 서울대학교의 여러 교수 및 소련 동구 연구소를 대리해 소련 과학원 시베리아분원 역사 언어 철학 연구소와 학술 교류의 정서를 교환했으며 이르쿠츠크 대학교 부총장 및 관계인사와의 면담을 통해서도 교류 가능성을 타진했다.
체제의 경직성과 사회주의적 무책임 주의에서 유래된 무조건적 기다림과 체념 및 극도의 과음은 이사회의 행태적 특징이며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외국인은 당황하기 일쑤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약간은 준비가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필자도 여러 번 당황한 적이 있었다. 필자가 대학원생을 데리고 갔던 것은 소련에서 머무르는 동안의 모든 경비를 주최측에서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해보니 우리 역시 참가비로 1인당 1천5백80달러를 내라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경비부담 약속을 했던 책임자와 만나 약속이 다르지 않느냐고 항의했으나 그는 결코 그러한 약속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일은 각종 채널을 통한 교섭 끝에 1인당 3백80달러를 내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문서화된 약속도 아무런 예고 없이 취소될 수 있음을 소련과 관계를 맺으려는 모든 사람들은 명심해야 하고 학술 교류를 포함한 모든 교류도 현재의 형평에서는 극히 신중하게 진행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필자가 접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은 공공연히 『우리는 자본주의사회가 되어야 한다』 『혁명은 단지 민중을 러시아제국주의의 사슬로 묶어 놓았을 뿐이다』 『이 나라는 외국인을 위한 나라이지 소련 국민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는 등의 말을 거침없이 내뱉곤 했다. 아마도 현재의 소련사회 변화와 본질을 이해하려면 소련에서는 아직도 「먹는 문제」와 「절대 빈곤」이 해결되지 못하였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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