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석재의천문학이야기

영어 마을과 외계인 마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어느 지자체를 가도 우리 고장의 꽃, 우리 고장의 새는 있지만 우리 고장의 별은 없다. 우리 고장의 별을 지정하는 일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예컨대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자체에서는 당장 황소자리를 '찜해야' 하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단종제가 한창 열리고 있던 1998년 봄 국내 최초로 '단종 별' 봉헌식을 열었다. 이 별은 사자자리의 1등성 레굴루스로 단종제가 열릴 때 밤하늘 높이 뜰 뿐 아니라 서양의 전설에서도 '어린 왕자'로 알려져 있어 아주 제격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영월은 봉래산에, 대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시민천문대를 보유하게 됐다.

전북 남원시에서는 2000년 처녀자리의 스피카라는 별을 '춘향 별'로, 목동자리의 아크투루스라는 별을 '몽룡 별'로 지정했다. 이제 여름 밤하늘에 견우.직녀가 있듯이 봄 밤하늘에는 춘향.몽룡이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기 고장의 별을 지정하는 일은 최소한 운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1등성의 개수가 10여 개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기 고장의 별을 지정하고 싶은 지자체는 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지자체에서 먼저 지정한 별을 다시 지정하기는 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과 같이 밝게 보이는 행성도 생각해 볼 만하다. 글로벌 시대 과학이나 미래를 표방하려는 도시는 아름다운 고리를 가진 토성의 모습 위에 영어로 도시 이름을 쓰면 제격인 것이다.

우리 고장의 별을 선정하는 일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제주도 서귀포시 시민천문대에 가면 올 겨울 '남극노인성'을 잘 볼 수 있다. 한 번만 봐도 오래 살 수 있다는 전설을 지닌 '남극노인성'을 이용해 제주도에서는 실버산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만 이 별이 무난히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자체마다 축제가 있다. 그 축제라는 것이 특산품을 소개하는 것 빼놓고는 내용이 대동소이한데 정작 아이들을 위한 행사는 거의 없다. 교사들이 천체망원경을 하나씩 가지고 나와 공설운동장에서 별 축제를 여는 일이 전국적으로 확산돼야 한다. 아이들은 별을 봐서 좋고 교사들은 지역사회에 기여해서 좋아 일석이조의 행사가 아닐 수 없다. 경북 영천시는 한국천문연구원 보현산천문대와 함께 아예 '별빛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회성 행사보다 서두에서 언급한 외계인 마을 같은 것을 세우는 지자체나 테마파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을 입구부터 반쯤 땅에 틀어박힌 거대한 비행접시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다른 별에 도착하는 절차를 밟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과학 공부도 시키고, 우주만화.우주음악.우주미술.우주연극도 소개하고, 외계인이 시중드는 식당도 열고, 외계인 가면 같은 상품도 만들어 팔고, …, 얼마나 좋은가.

경기도 화성시에서는 마침 지자체 이름이 행성 화성과 같다는 점에 착안해 천문공원을 만들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강원도 화천군에서도 천문학계 원로 조경철 박사와 관련된 천문시설을 건설할 계획이란다. 어디 지자체뿐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한일철강 엄춘보 회장이 사재를 털어 서울 근교 장흥유원지에 시민천문대를 세우고 있다. 이는 선진국에서는 흔한 일로 만시지탄의 감마저 있다. 이제야 나라가 우주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 같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