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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오든 손해” 평양측 계산/「선별방북」도 거부한 북한의 속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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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문 열면 곧 체제 무너진다”위기감/자유왕래 소리만 요란 모두 불발/내달 「고위급회담」에 부정적 영향 가능성
노태우 대통령이 7ㆍ20민족대교류 선언에서 제안한 13∼17일 사이의 남북 자유왕래는 사실상 모두 무산되게 됐다.
정부는 13일 북한측이 방송을 통해 초청의사를 밝힌 재야단체들의 명단만이라도 전달하려 했으나 북한이 이마저도 접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간차원의 교류라도 반드시 책임있는 당국이 교류를 주관하고 신변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우리정부와 당국은 철저히 배제하려는 북측입장이 맞선 결과다.
북한은 우리당국을 배제한 채 14일에 우리측 재야단체와 실무접촉을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13일 방송을 통해 제안했으나 우리측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음은 평백하다.
정부 당국자들은 그 이유로 ▲이미 남북간에는 방문자의 신변보장문제를 당국이 책임지는 관례가 있고 ▲현실적으로 당국 이외의 단체가 신변안전보장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북한이 우리정부를 배제시킨 채 특정 재야단체들과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대화공세를 시도하는 것은 방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14일 남북 민간단체들간의 실무접촉은 우리당국이 불허할 것이 틀림없어 이뤄질 수 없게 됐으며 이 접촉 후에 북한이 우리측에 전달하겠다고 밝힌 신변안전보장 각서도 명단수수가 무산됨에 따라 작성도 전달도 수령도 되지 못하게 됐다.
북한이 스스로 방북을 초청한 재야인사들만의 명단조차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실제로 이들의 방북을 꺼리기 때문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애당초 북한의 재야단체 초청방송자체가 선전차원에 불과했는데 우리당국이 이를 허용하겠다고 나서자 당황한 나머지 우리정부가 받아들이지 못할 당국배제논리를 고집하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북한은 지난 11일 조평통대변인 성명에서 『남조선 당국이 북한측 지역을 방문하려는 남측 민간단체들의 자주적인 활동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약한다면 이들의 내왕에 필요한 신변안전담보각서를 교환하기 위해 당국 실무자 접촉에 나갈 것』이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북한은 13일 중앙방송에선 『구태여 남족선 당국으로부터 명단을 넘겨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민간단체들의 내왕문제에 끼어든다』는 등으로 이를 부정하는 등 스스로도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북한이 재야단체만의 선별방북조차 무산시키려는 것은 남북간 인적교류가 개방바람을 몰고 오며 개방바람의 유입은 곧 체제붕괴로 이어진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그들이 초청한 대상인원이 모두 방북하게 되면 ▲전민련 1백76명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33명 ▲민중당 30명 등 2백여명에 이르는데다 만약 서총련측 대학생 1천6백여명에 취재기자 5백여명까지 포함되면 이들로 인한 개방바람 유입이 걷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해 7월 임수경양의 평양축전 참가때 이를 대남선전에 이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뒤 내부적으로 상당한 남한사회 동경분위기가 조성됐다는 관측이 그 예다.
임양은 김일성의 초상이 그려진 T셔츠를 내동댕이 치는 등 각종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김일성 유일사상에 젖어있던 주민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남조선에서 탄압받고 있다는 임양의 태도가 활달하고 영양상태가 좋아 저 정도가 탄압받는 인사라면 남한사회도 자유롭고 살기좋은 곳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북한주민들이 갖게 되는 후유증을 남겼을 것이라는 게 관계당국의 분석이다.
현재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속에서 철저한 주민통제에 의한 폐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일에 대한 부자세습에도 내부적으로 상당한 반발이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북한은 개방바람이 유입되면 폐쇄통제사회가 붕괴해 버릴 것이라고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따라서 북측으로서는 재야단체들의 대거방북도 두려우며 북측은 특히 이번에 재야단체의 방북을 허용하면 이것이 앞으로 민간교류의 선례가 될 것도 가장 싫어한 것 같다.
북한은 이와 관련,동구사회주의 정권들이 속속 붕괴되자 지난 1월 이들 국가주재 대사들을 평양으로 모두 소환해 1주일 이상 집중적으로 이들과 분석 및 대책회의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때의 회의에서 동구사회주의 붕괴 원인은 개방바람 유입 때문이며 직접적으로는 ▲외화를 벌기위한 서방관광객 유입조치가 주민의 개방의식을 불렀고 ▲가톨릭 등 종교계가 개방ㆍ개혁요구의 집결본부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는 것이다.
북한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평양통일미사 희망에 대해 보름가까이 침묵하다가 지난 10일에야 비로소 초청의사를 밝힌 것도 종교계를 억눌러야 한다는 판단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맺은 금강산 개발계획을 취소한 것도 관광객 유입은 안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은 앞으로도 인적교류에 대해선 선전차원의 공세만 펼뿐 실제적 교류는 갖지 않으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13일 시작된 민족대교류 기간은 앞으로 17일까지 며칠이 남아 있으나 북한이 이같은 판단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한 교류성사는 무망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북한은 교류저지 수단으로 당국배제논리를 내세우고 있고 우리정부는 당국이 배제된 교류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한편,교류의 절차문제를 둘러싼 이같은 남북한간의 대립은 오는 9월4일 서울에서 개최예정인 남북고위급회담의 성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조현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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