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준 연대교수ㆍ정치학(광복절특집 논단: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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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친다고 통일 오지 않는다/민족교류 위해 양보하면서/도발 억지 게을리 않는/전략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한반도가 양단된 지 45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남북간에는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 현실을 극복하고 남북관계의 개선과 궁극적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이 목적과 일관성을 갖는 정책수단을 모색하는 전략적 사고가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가 원하는 통일은 평화ㆍ협력및 교류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다. 남북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도 이 목적과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주어진 여건에서 실현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국민적 합의에 근거해야 할 뿐 아니라 잘 조화되고 제도화된 절차를 통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몇가지 원칙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대북협상과 교류에서 일관성을 상실하면 국민들과 상대방의 태도에 혼선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물론 긴장완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 북한의 주장도 최대한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7ㆍ20제의」는 민족교류를 위해 취해진 과감한 선제양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용의 한계를 결정하는 것은 일정한 원리원칙에 기초해야 한다. 즉 수용할 것은 과감히 하되 지킬 것은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교류목적과 국내의 법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내에서 전민련의 「범민족대회」의 참여와 방북은 허용되어야 하며,또 그러한 기회는 기타 단체들에도 동등하게 부여되어야 함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북이 기도하는 혁명과 무력도발은 철저히 막는 「수용적 억지」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작금의 국제관계에서는 동서냉전이 해소되는 틈을 타 군사적으로 막강한 이라크가 약소국인 쿠웨이트를 강점한 것을 직시할 때 우리는 국가안보를 결코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북한측이 요구하더라도 국내법 문제를 협상하겠다든지,형사제도에 간섭을 허용하는 것은 상기 원칙에 위배된다. 만약 국가보안법이 기존하는 사례와 격차를 내고 있다면 국회가 재개되어 그것을 먼저 현실에 맞게끔 개정해 이 나라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남북관계에서는 실현가능한 것부터 우선 제시할 때 타당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북한의 대중매체를 일반에 개방한다든지,군축방안의 대강을 제안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한편 상대방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그것을 제안한 뒤 구체적 행동을 취하는 것은 국민들의 기대만 고조시키고 나서 실망을 안겨주니 6만여명의 방북신청을 받아놓고 거절당한 것이 그 한 예다.
진실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려면 양측이 상호이익에 입각해 합의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셋째,아무리 좋은 제의도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와 합의없이는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시적 정략으로 기도되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정책책임자들은 정권이나 정당보다 민족과 국가를 관리한다는 차원에서 신중한 자세를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정책이 입안되기 전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우익」 또는 「좌익」만이 아니라 중간계층을 포함한 절대다수가 그것을 지지할 때 소기의 효과를 갖는 것이다.
넷째,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정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협의와 조정을 하는 일이다. 이러한 절차를 여과하지 않고 졸지에 새로운 제안을 발표하고 그 뒤에야 후속조치를 급하게 취하게 되면 그 방향과 내용에 대하여 관계기관간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때로는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북한 제의는 대미 협력,대소 북방정책및 심지어 대세계 통상정책과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실 한소수교가 임박했고 미국은 대아시아 전략을 재평가하며 중동에서는 전운이 일고 있어 국제유가를 치솟게 하고 있는 이때 북한은 실로 궁지에 몰리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포착해 실현가능한 신뢰구축및 군축안과 경제협력방안을 총리회담에서 제시해 민족적인 차원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상부상조하는 길을 실질적으로 터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와같이 체계적인 전략수립을 위해서는 정책결정과정이 제도화되며 거기에는 지적 투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여러가지 대안과 모형을 개념적으로 연구ㆍ기획하고 나아가 그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헌법절차에 기초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행 헌법 91조에 규정된 국가안보회의를 활성화하여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대전략을 정립하게끔 조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정책실무자들은 당장 눈앞에 부닥치는 문제에 대응하는 데 급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통상적인 결정도 큰 원칙에 근거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구사하는 전략적 고려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우리가 진실로 자신감을 갖고 남북관계를 주도할 수 있으며 방향및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 관계개선과 통일은 우리의 국내에서 안정을 되찾고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목적에 우리가 단결할 때 그 전망이 밝아지는 것이다.
한편 이 전망은 북한이 스스로 변화할 때 더욱 현실성을 갖는다. 통일은 그것을 외친다고 해서 쉽게 오는 것은 아니고 참된 의지를 갖고 꾸준히 쌓아가야 할 과업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남북간에 오간 제의는 먼 훗날에는 하나의 장난으로 보일지 모른다. 우리는 보다 조용하고 의연한 자세로 통일로 가는 길에 돌을 하나씩 쌓아가는 과업을 착실히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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