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실험 이후 핵물질 이전 방지를 물러설 수 없는 '레드라인(저지선)'으로 내건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PSI를 핵심 수단으로 꼽고 한국의 참여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19일 방한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PSI 참여를 종용한 데 이어 20일에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공식 의제도 아닌 이 문제를 거론하며 압박을 가했을 정도다.
하지만 노 대통령으로선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PSI 정식 참여가 북한의 반발을 부를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래 노 대통령은 PSI와 관련해 공식 언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라이스 장관과의 면담(20일) 때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문제와 뭉뚱그려 "유엔 결의를 준거로 해 그 취지와 내용에 부합하도록 조치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청와대 참모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PSI에 정식 참여한다고 선언할 경우 남북관계가 퇴보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더구나 PSI 문제는 정치권의 논란까지 부르고 있다. 한나라당은 한.미 동맹을 들어 참여를 종용하는 반면,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절대로 PSI에 참여해선 안 된다. 안이한 공직자는 책임을 추궁하겠다"며 날 선 경고를 하고 있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도 20일 라이스 장관과의 회담에서 두 가지 이유를 들어 PSI 정식 참여가 어려운 사정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회담에 배석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 두 가지는 "국내에서 PSI 참여는 곧 남북 간의 긴장 고조로 이어진다고 과장되게 이해되고 있다"와 "정치권에서 반대가 있다"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으로선 PSI 참여와 관련해 참여하면 하는 대로, 참여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나라 안팎의 반발을 사야 하는 샌드위치 신세다. 참여 결정을 내릴 경우엔 열린우리당 등 진보층과 북한으로부터, 참여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릴 경우 한나라당 등 보수층과 미국으로부터의 공세를 감수해야 한다. 노 대통령이 최종 선택 시기를 미루며 장고를 거듭하는 이유다.
하지만 선택 시한이 다가오며 청와대와 외교안보 부처 일각에선 참여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외교부 내에 이런 현실론이 팽배하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PSI 참여 확대가 불가피하며, 참여해도 현재로선 특별히 문제될 게 없다는 쪽으로 의견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반면 통일부 등은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에 기울어 있다. 한 관계자는"'PSI 참여'라는 용어만큼은 절대로 쓸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정부가 지난해 PSI 8개 항 중 '정식 참여' 등을 뺀 5개 항에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논의를 할 당시 북한이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반발한 사례도 들고 있다.
이상언 기자
◆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대량살상무기(WMD)와 제조 기술의 국가 간 이전.운반을 막기 위해 미국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 협력체계. 대량살상무기 등을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항공기.화물선을 공해상이나 우방의 영해.영공에서 강제로 검문하거나 검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