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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대위 전 전주예수병원장(일요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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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술선교 36년 한국인 되어 떠나는 미국인/인정을 배우고 갑니다/양보심 부족 너무 안타까워/비빔밥 먹고싶을 땐 어떡할지 걱정
미국인 데이비드 존 실씨 하면 선뜻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러나 의료선교사 「설대위」 박사하면 『아,그사람!』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금방 그를 기억해낸다.
바로 그 사람,36년동안 하느님과 함께 환자를 돌본 「푸른 눈의 한국인」 설대위박사(65)가 정년으로 임기를 마치고 25일 오후 「제2의 고향」인 한국을 떠났다.
의료선교사로 휴전직후인 54년 한국에 와 전주예수병원 원장으로,암치료 전문외과의사로 인술을 펴온 그는 특히 농촌주민들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이들의 등불이었었다.
우리의 자연을 끔찍히 사랑했고 우리 말을 우리보다 유창하게 할 정도로 반한국인이 돼버려 이름도 미국본명보다 「설대위」라는 한글이름이 그에게는 더 친근하다.
『전주비빔밥과 순두부국이 먹고 싶을 때 어떻게 견딜지 지금부터 걱정』이라는 그를 비행기에 오르기 몇시간전인 25일 아침 만났다.
○출국직전 인터뷰 만나면 헤어져야
­강산이 세번 하고도 반이 변할 세월동안 살아온 한국을 불과 몇시간후면 떠나시는데 귀국 소감은.
▲반평생을 살아온 한국,특히 전주는 제2의 고향이 되고말았어요. 그러나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한국말처럼 아쉬움과 함께 기쁨을 안고 떠납니다. 하느님과 여러분의 은혜를 입어 참으로 만족스런 생활을 했습니다.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몸은 비록 떠나지만 마음은 언제나 이곳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도 오랫동안 이곳에 살다보니 의식구조와 생활방식까지도 한국인화돼버린 것 아닙니까.
▲나자신 반은 서양인이고 반은 동양인이 되고 말았어요. 예의바른 한국사람들만 대하다 간혹 미국에 갔을 때 멋대로 행동하는 그곳 젊은이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들정도니까요.
그만큼 한국사람이 돼버렸고 이곳의 모든 것,사람과 그 아름다운 자연은 정말 잊지못할 겁니다.
­자연예찬론을 펴셨는데 평소 산등 자연을 찾을 기회는 있었습니까.
▲얼마전에도 미국에 사는 아들과 손자가 와서 함께 지리산에 갔는데 갈 때마다 참 아름다워요. 내 생각에 한국인들은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대로 알지못하는 것 같아요. 아마 한국의 자연환경은 스위스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일 것입니다.
설악산ㆍ지리산ㆍ속리산 등의 그 장엄한 모습과 폭포ㆍ골짜기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특히 붉게 불타는 설악산의 단풍은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비롯,많은 사람들을 대하며 옆에서 지켜본 한국인은 어떠했습니까.
▲한국사람들은 무엇보다 예의바르고 훈훈한 인정이 넘칩니다. 특히 환자들은 감사할 줄 알아요. 밤새도록 수술을 해 어려움을 넘기고나면 나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해요. 어떤 때는 완쾌돼 퇴원한 농촌사람들이 삶은 감자나 찐 옥수수를 한보따리 싸들고 찾아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애당초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나는 1925년 미국 플로리다주 브레덴톤에서 태어났는데 칠레에서 선교사 생활을 한 선친의 영향으로 신앙의 길을 택하게 됐죠. 미국 뉴올리언스 브레인대학에서 의학수업을 마친 후 53년 남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돼 54년 한국에 와 전주예수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이곳 생활을 시작했어요.
○병고쳐 줘 고맙다 찐감자 인심 감동
­54년에 오셨으면 휴전직후 전후복구로 사회도 어수선했고 의료시설도 빈약했을텐데요.
▲54년 4월18일 전주에 도착했는데 수련의를 포함,의료진은 12명밖에 안된데다 병상 1백40개뿐인 병원시설로는 몰려드는 부상자ㆍ전염병환자들을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의약품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가하면 수술중 정전으로 당황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때는 전염병도 많고 암환자들이 몰려들어 속수무책이었지요.
­한국의 지금과 그때를 비교하신다면.
▲당시는 정전직후여서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어요. 지리산주변에는 57년까지 빨치산이 출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당시의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기적에 가까운 발전을 이룩했어요. 내 생각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1백년 걸릴 발전을 단 30여년 만에 이룬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쟁하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활기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주도면밀한 장기발전계획 덕분으로 봅니다.
­박사께서는 대한두경부 종양학회를 처음 설립하고 한국최초로 암환자등록사업을 시작하셨죠.
▲예수병원 종양외과 과장을 67년까지 지냈고 그때 종양진찰실을 개설,암환자 등록사업을 했어요. 이를위해 미국으로 가서 다시 암병원에서 2년동안 연구를 했죠. 그후로 암환자에 대한 종합진찰ㆍ수술요법ㆍ방사선치료ㆍ화학치료요법 등을 단계적으로 실시했습니다.
­20여년동안 예수병원장으로 재직하면서도 계속 외과의사로 일하셨는데 그동안 가장 큰 보람은.
▲의료선교사란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치유도 같이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뜻있는 생활,의미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가장 기쁨이 컸습니다.
특히 69년간에 이상이 있던 50대남자의 수술중 갑자기 심장이 멈춰 병원의 전의료진이 총동원돼 심장마사지와 83명의 혈액을 공급한 끝에 살렸을 때 의사로서 보람을 느꼈어요.
○휴전직후 한국에 수술중 정전일쑤
­반대로 안타까운 순간은 없었습니까.
▲의사는 환자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는 사람들인데 살리려고 노력하던 환자들이 끝내 숨질 때가 참 괴로워요. 환자는 물론 제자신도 그 병마에 굴복한 느낌이 드니까요.
­흔히 의술을 인술이라고들 합니다만.
▲의사는 인체의 귀ㆍ위ㆍ다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술이 「전인치료」를 할때 인술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요즘 대부분의 의료인들이 기계화ㆍ비인간화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곤해요. 환자가 「사람」이란 사실을 망각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때가 많지요.
­한국을 떠나시기 앞서 우리 한국인들이 꼭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보다 자립심과 책임감을 기르고 질서의식을 갖춰야 합니다. 한국이 교통사고 최상위국이라는 불명예는 자동차가 많기도 하지만 그만큼 질서의식이 부족하다는 증거죠. 이기주의에 앞서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
­다시 한국에 올 계획은.
▲전주예수병원의 자문을 맡게돼 앞으로도 일년에 한차례씩은 한국에 올 계획입니다.
미국에서 자문을 맡게될 원호병원의 암센터와 예수병원을 잇는 가교역할을 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가을을 이용,이곳에 와서 단풍으로 붉게 물든 설악산을 꼭 다시 찾겠습니다.<정순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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