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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누명운전사 법정투쟁 20개월/변호사 도움없이 이겼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추돌로 동승자 숨진 오토바이 운전사/“트럭에 받쳤다” 거짓 증언/현장모형 만들어“결백”호소/1심서 유죄 판결 2심 무죄
교통사고를 낸 혐의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국졸 학력의 중장비 운전사가 변호사 도움없이 20개월간의 외롭고 힘든 법정투쟁으로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아내 누명을 벗게 됐다.
서울형사지법 항소10부(재판장 정상학부장판사)는 21일 오토바이를 타고가던 사람을 치어 숨지게 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금고1년ㆍ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던 레미콘 트럭(15t)운전사 유길상피고인(36ㆍ서울 대림동 688의30)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 피고인석에 서있던 유씨의 두눈에서는 주루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울지않겠다고 몇번씩이나 다짐했던 유씨였지만 승리의 기쁨과 복받쳐오르는 설움을 억제할수 없었다.
이때도 유씨의 두손에는 어김없이 사고현장을 축소제작한 손때묻은 철판과 자동차모형ㆍ인형 등이 들려있었다. 이 모형은 억울함을 호소할길 없던 유씨가 사고현장을 1백분의 1로 축소한 것으로 10여차례의 재판때마다 들고나와 자신의 무고함을 설명하던 유씨의 유일한 무기였다.
유씨가 사고에 휘말린 것은 88년 11월28일 오전10시50분,회사 레미콘을 몰고 남부순환도로 개봉동부근을 지날때였다.
차 뒷부분에서 「퍽」하는 소리가 들려 차를 세우고 뒤로 가보니 오토바이 1대와 두사람이 나뒹굴고 있었고 1명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유씨는 영문도 잘 모르는채 오토바이 운전사 오모씨(54ㆍ상업)가 『레미콘트럭이 오토바이 뒤를 들이받아 사고가 났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구속되고 말았다.
유씨가 무고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경찰과 검찰은 믿으려하지 않았고 1심 재판을 거쳐 집행유예로 겨우 풀려났다. 이미 55일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난 뒤였다.
『비록 배운게 없어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바른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경찰은 물론 판ㆍ검사까지도 제말을 곧이듣지 않을땐 혀까지 깨물고 싶었습니다.』
유씨는 출감하자마자 사고현장을 재현시킨 모형을 제작,10여차례의 2심 재판때마다 이를 들고 다녔다. 모형을 가지고 사고당시를 설명하면 긴말이 필요없었다.
다만 법정에 들어갈때마다 정리가 위험물로 잘못알고 압류하려해 처음 몇번은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항소심 재판중 유씨는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를 찾아냈다. 관할 구로서의 사건처리후인 88년12월 유씨 가족들의 진정에 따라 서울시경이 재조사한 사건경위서였다.
이 기록에는 『오토바이 핸들에 묻어있는 합성고무 성분과 레미콘 뒷바퀴의 팬 부분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 일치한다』고 되어있어 오토바이가 뒤에서 트럭을 들이받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가진게 없어 변호사선임을 못한 때문이지요. 사고직후 작성된 결정적 증거를 16개월만에 보험회사에서 찾아내다니….』
유씨는 재판을 진행하며 쓸데없는 법률지식은 꽤 늘었지만 너무 많은것을 잃었다.
사고운전사로 낙인찍혀 직장을 잃고 막노동판에서 일해야 했고 불면증도 생겼다. 한방울도 못하던 술을 소주 한병은 거뜬히 마시게 됐다. 건강하던 아내가 속병을 앓게된 것도 유씨가 구치소에 있을때였다.
『당시 살아남은 오토바이 운전사가 거짓말한 것도 보험금을 타기위해선 어쩔수 없었겠지요.』
이제와서 그들을 원망해서 뭣하겠느냐고 말하는 유씨의 표정은 승리뒤의 기쁨만이 아닌 우울함이 스쳤다.<홍승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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