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비 최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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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과소비풍조는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멸강충(멸강나방의 애벌레)만큼이나 삽시간에 이 나라 이 사회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
저녁 한끼를 먹는데도 보통 생산근로자의 1년 수입만큼을 쓴다고 하니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것인가. 이러한 접대경제가 아니고서는 세상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해 마신 술이 27억8천만ℓ(88년 통계)가 넘고 있다.
이처럼 먹여야만 일이 되는 사회부조리는 과소비의 큰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과소비의 요인은 불공정분배로 이득을 챙긴 불로소득계층의 사치와 향락에 있다. 옷 한 벌에 1천만원, 장롱 하나에 1억 원이라니….
한번 생각해 보자. 1천만원이라면 50만원 짜리 월급쟁이가 매달 25만원씩 뚝 떼어 36개월간은행에 적금을 넣고 37개 월 째가 되어야 만져 볼 수 있는 돈이고, 그렇게 해서 1억 원을 만지려면 무려 33년이 걸린다. 그런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는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노동자와 월급쟁이들이 못 먹고 못쓰고 적금한 돈을 빼내어 땅 사고, 그 땅을 잡혀 다시 투기하고, 뭐 그렇고 그렇게 해서 불로소득을 챙겨 가진 자들이 아니던가. 정말 이들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자기분수 모르고 빚져 가며 돈 쓰는 소시민도 과소비의 주범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소시민들의 과소비는 대체로 주위에서 맴도는 워낙 큰 수치들로 인해 셈의 개념이 둔화되어 저질러지는 과오다.
자신에겐 아주 큰10만원이 1천만원 옆에서는 1백분의1 축소형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큰 10만원을 쉽게 써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과소비풍조에 최면이 걸려 버린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도 과소비의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심리적 요인이다.
동물실험에서 보면 어렸을 때 굶주린 동물은 커서 아무리 먹이를 넉넉히 주어도 항상 음식을「걸터듬이」(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더듬어 찾음) 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도 가난했다. 그래서 지금도 음식을 보면 배가 불러 거동을 못하도록 먹어야 먹은 것 같고 물건을 가져도 외제를 가져야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카를 융의 이론에 의하면 민족에 흐르는 유전심리 같은 게 있다고 한다.
굶주림이 민족의 무의식 세계에 깔려 있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분별없이 물질을 탐하는 게 아닐까. 굶주림이란 당장 시험해 보아도 과소비의 원흉임을 알 수 있다. 배고플 때 시장에 가면 필요이상으로 물건을 사게 되지 않는가.
그러나 이제 이 나라 경제수준이면 굶주림의 상처를 잊을 때도 되었다.
그러니 이젠 탐하는 것에 염치를, 소비하는 일에 절제를, 그리고 소유하는 것에 양심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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