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2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이인 법무 동생도 열성당원/체포되어 탈당했지만 정태식 권유로 재입당
남로당에는 미군정이나 이승만정권의 고관 자제들도 들어와 당을 돕고 있었다. 미군정부터 이승만정권에 걸쳐 검찰ㆍ사법의 최고지위에 있었던 이인의 동생 이철이 이론진에 있었다.
그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를 나왔으니 그의 형 이인을 따라갔으면 한국 사법계를 지도할 인물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사건건 이인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인의 가정내 뿐만아니라 이인의 집무실안에서도 형제간의 갈등이 벌어졌다는 정보가 들려왔었다.
이철은 드디어 경찰에 체포되어 탈당성명서를 발표하게까지 되었다. 정태식은 인간적으로 이철을 좋아했다. 정태식은 나에게 이철을 만나 탈당성명서를 취소하고 당으로 복귀하라고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이철의 뒤에는 경찰의 감시가 붙어 있을 것이며 또 한번 탈당성명을 낸 사람이 어떻게 당에 돌아올 것인가?
정태식은 나에게 지시만 내리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당에서는 상부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었다. 나는 연락원을 시켜 날짜와 시간은 내가 정하고 장소는 이철이 정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지정해온 장소가 남산밑 모변호사 집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유치장에서 피를 토하게되어 마음이 약해 살아서 나와 병치료를 하려고 그랬다』고 머리를 숙였다.
나는 이철을 위로해주며 『우리가 다같은 양심적 인텔리로서 당이 위급한 이때에 어찌 당을 배신하겠는가?』고 나의 심정을 이야기하니 그는 눈물을 흘리며 『정말 저같은 것을 당에서 다시 받아 주실수가 있습니까?』하고 나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돌아와서 정태식에게 보고하니 『정말로 잘됐소』하며 진심으로 기뻐했었다. 나도 이철을 좋아했다. 6ㆍ25후 나는 그를 서울 중앙방송국에 배치해 주었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유엔군에 쫓겨 북에 도피하던 도중 그는 중공군에 포위당해 그만 사살당하고 말았었다. 검찰총장ㆍ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인은 해방전에도 허헌ㆍ김병로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애국적 변호사의 한사람이었었다.
장택상의 큰딸 장병민은 그녀의 아버지와 반대로 자기의 생명과 전재산을 바쳐 남로당을 도왔었다.
그녀가 남로당 최고간부의 한사람인 정태식을 알게된 것은 그녀의 남편 채항석을 통해서였다. 채와 정은 청주에서 같이 학교에 다녔었다. 둘이서 항상 1ㆍ2등을 다퉜었다.
정은 집이 가난해 장학생으로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채는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나왔었다. 채는 대학시절 장병민과 결혼해 동경에서 부부생활을 했었다. 다감한 장병민은 동경제대근처의 책방에서 서울에서는 보지도 못한 자유주의ㆍ인도주의ㆍ사회주의의 책을 보기시작했다. 채항석은 대학을 나와 조선식산은행(해방후 산업은행)에 취직했다.
그는 온건한 자유주의 인텔리로서 묵묵히 은행사무만 보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의 장인 장택상이 갑자기 수도경찰청장이 되었었다. 채항석은 그의 장인과 식사를 하다가 무슨말끝에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상의 자유,집회ㆍ결사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장의 좌익탄압에 의문을 표시하자 장은 크게 화를 내어 사위에게 타박을 주었었다.
하루는 정태식이 나에게 오후 일찍이 아지트에 오라기에 가니 『지금 채부인이 일가에 가서 사교춤을 배우고 있는것 같으니 곧 가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모르는체 해둡시다. 우리도 이런생활에 숨이 막히는데 우리와 운명을 같이하는 그녀는 어떠하겠습니까』하고 말려도 그는 안된다고 꼭 가서 당장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데리고 와도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하고 이화동에 있는 그녀의 친척집을 찾아갔었다.
그녀를 부르니 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오며 『정선생한테 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십시오』하고 타일렀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하고 정태식앞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의 입장을 생각할때 나의 눈시울이 나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