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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실험 이후 요동치는 한반도 질서…미·일·중·러 '새 짝짓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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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외교 기상도가 급변하고 있다. 북한 핵실험의 여파다. 남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는 핵실험 이후 전통적인 외교관계 틀에서 벗어나 국익 챙기기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이 각축을 벌였던 19세기 말의 국제정치 상황이 재현되는 느낌이다. 북한 핵실험이 동북아의 국제관계에 격동을 불러오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 북한과 함께 고립 위기에 처한 한국=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평행선을 달린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뒤에도 좁혀질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압박'을 뛰어넘어 '봉쇄'를 추진하고 있다. 봉쇄의 최대 무기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구상(PSI)을 치켜들었다. 한국의 PSI 적극 참여가 북한 고사(枯死)의 필수조건이라고 판단한다.

17일 방한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방한해 PSI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한국의 참여 확대를 요청한 셈이다.

하지만 한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 제1718호를 소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참여 확대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안보리 결의가 채택된 직후에도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협공이 예상되자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가 16일 "결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적절하게 필요한 수준에서 우리의 (PSI) 참가 폭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은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사업도 지속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공개적으로 이들 사업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는 "북한 정권에 혜택을 주는 모든 프로그램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런 입장 차 때문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단호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한에 맞춰 19일 서울에서 열릴 한.미.일 외무장관 회동이 한.미관계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라이스 장관과 아소 다로(生太郞) 일본 외상은 그 자리에서 대북 제재를 놓고 한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북한의 핵실험 직후 위기 돌파 카드로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중국이 예상 외로 미국에 협조하면서 대북 제재에 나서고 있어 한국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PSI 등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외면할 경우 한.미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물론 북한과 함께 한국도 고립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 찰떡 공조 과시한 미.일=일본은 미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북 제재에 나서고 있다. 안보리 결의 제1718호보다 강경한 대북 제재를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변사태법'을 적용해 해상자위대가 동해.동중국해에서 북한 선박에 대한 검색을 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이 계획을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의 공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핵실험 이후 대북 제재 추진 과정에서 '범세계적 동맹'임을 과시하고 있다.

미.일의 찰떡 공조는 대북 제재에 미온적인 중국과 한국을 압박하는 데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정도다. 북한 핵실험의 최대 피해자가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최대 수혜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라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평가다.

◆ 입장 바뀐 중.러=중국은 핵실험 전까지는 북한의 정치적 후견국이었다. 최대 무역국이자 투자국으로서 고립된 북한 경제를 연명시켜 왔다. 그런 중국이 핵실험 이후엔 돌변하고 있다. 강경한 목소리로 북한을 비난한다. 국경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대북 송금을 막고 있다. 심지어 북한에 들어가는 무역물품 검색도 하고 있다. 중국이 유엔 결의 이행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권력 서열 2위인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16일 방중한 오기 지카게(扇千景) 일본 참의원 의장을 만나 자리에서 "(북한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중국이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제2 경제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선 미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미.중 공조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러시아는 북한과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모양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외교차관은 핵실험 직후 평양과 서울을 잇따라 방문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일 "북한은 사실상 아홉 번째 핵 보유국이 됐다"고 밝혔다.

각국이 북한의 핵실험 성공 여부에 판단을 유보하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우호적 발언이었다. 11일에는 예정대로 북한에 곡물을 지원하기도 했다. 북한의 후견국 역할을 자원하고 나선 셈이다. 남한을 '인질'로 탄도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한 북한은 핵 보유국 지위를 추구하면서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

전봉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중국은 대외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경제성장에 강박감을 갖고 있어 미국과의 공조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라며 "다극주의를 주장하는 러시아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게 국익에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철희 기자

◆ PSI(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대량살상무기(WMD)와 제조 기술의 국가 간 이전.운반을 막기 위해 미국 주도로 발족한 국제 협력체계.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항공기.화물선을 공해상이나 우방의 영해.영공에서 강제로 검문하거나 검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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