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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미국, 개성공단은 'OK' 금강산은 'NO'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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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천영우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中)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左),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교차관이 17일 외교부 청사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17일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북한 정부에 돈을 주기 위해 고안됐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금강산 관광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대북 포용정책의 상징으로, 1998년 이후 계속돼 왔다. 이를 미국이 평가절하한 것이다. 그래서 대북 제재 수위와 구체적 대상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의 대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 김정일의 달러 돈줄 차단 겨냥=힐 차관보는 금강산 관광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의혹 제기 차원을 넘어 의미를 부정해 버린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관리가 이처럼 금강산 관광 사업에 노골적인 불만을 쏟아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평소 외교관다운 신중한 언행을 해온 힐이 이날은 완전히 다른 단호한 모습이었다. 힐은 자신의 발언이 사견임을 전제로 했다. 한국 측에 사전에 이런 입장을 통보했는지, 어떤 조율을 거쳤는지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언급에 앞서 워싱턴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 장관은 "남북경협과 관련한 한국의 결정을 주시하겠다"고 밝혔다.

대북 제재 조율을 협의하러 일본과 한국.중국.러시아를 순방하기 하루 전 기자회견에서 대북 경협사업을 거론한 것이다. 라이스의 예고에 이어 힐 차관보는 한국정부와 북한에 구체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라이스 장관이 방한 시 한국 측에 강도 높은 대북 압박 필요성을 제기할 것이란 관측이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문제 분리 대응=힐은 개성공단 사업에 대해서는 "인적자본을 대상으로 한 장기투자를 위해 고안된 것 같다"며 "이해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미국이 보여온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 것이어서 주목된다.

미국은 2003년 6월 착공한 개성공단 사업에 그동안 더 강한 의심을 보내왔다. 북한 근로자의 임금이 직접 지급되지 않고 북한당국에 건네지는 데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올 초에는 제이 레프코위츠 미 북한인권 특사가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의 임금 문제(수당 등 포함 월 66달러 수준)를 제기하며 '노예노동'의혹까지 제기해 한국 측이 반박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관광 대가로 8년간 달러현금만 4억5600만 달러 이상 북한에 건네진 금강산 관광을 우선 목표로 삼은 것"이라고 배경을 풀이했다. 반면 개성공단은 북한 근로자의 임금 등으로 889만 달러가 북한에 유입되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계좌를 동결시킨 이후 김정일의 돈줄 차단에 나선 미국이 금강산 사업을 그대로 두고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 측의 구체적인 의중은 19일 서울에서 열릴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북송 달러 용처 정부도 몰라=정부 당국자는 힐 차관의 발언에 대해 "예상 외로 부시 행정부가 거세게 나오고 있다"고 당혹스러워 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결의(1718호)에 "금강산과 개성공단은 대량살상무기(WMD)와 무관하니 계속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던 입장 정리가 너무 안이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가 고민스러워 하는 대목 중 하나는 북한으로 유출된 달러가 어디에 쓰이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정부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98년 10월 "북한에 유입될 관광대가의 군사비 전용을 감시하기 위한 체크리스트(점검 목록)를 만들 것"이라고 공언했다. 북측에 건네지는 경협 자금과 수출입 대금, 북측의 예산 규모를 놓고 돈 흐름을 세밀하게 따져 보면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란 얘기였다.

그러나 통일부 당국자는 17일 "북한에 제공된 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때도, 지금도 없다. 대북 체크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는 북한 핵실험 이후 유엔안보리 결의안(1718호) 채택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결의안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 유입된 돈이 어디로 갔는지 파악조차 못하는 현실에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핵.미사일 같은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자금과 관광대가 등을 명백히 구분하기 어렵고, 전용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최근에는 북한 군부로의 경협자금 유입 징후까지 드러나고 있다. 개성공단의 토지 임차료와 지장물 철거 비용 1200만달러 중 상당부분은 이곳을 관할하던 군부 몫이 됐다고 한다.

북한에 제공되는 자금.물품의 전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는 현재 우리 관계자가 쌀 배급 현장을 몇 차례 방문하는 게 전부다. 그것도 북한이 지정하는 장소.시간에 한해 이뤄져 실효성이 의문이다.

북 핵실험을 계기로 이런 허술한 감시 체계에서 벗어나 정부가 대북 달러 제공과 물자 지원에 엄격한 기준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이제는 '자금 전용 우려를 불식시킬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대북 지원은 어렵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영종 기자

◆ 안보리 결의 1718호=북한의 핵실험 성공 발표 닷새 만인 14일 안보리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대북 제재안.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지원하는 자금과 금융자산의 동결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국은 금강산 관광이 이와 무관하다고 하는 반면 미국 등은 관광 대가 등 대북 자금제공을 따져보겠다는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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