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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2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빨치산 월동대책 지원 하라”/박헌영 지시에 정태식은 천진난만한 보고
정태식이 김삼룡과 가두연락하는데 내가 수행한다는 것은 나에게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만일의 경우 나의 생명을 걸고 이들을 호위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었다.
김삼룡과의 가두연락을 무사히 마치고 정태식을 동숭동 아지트까지 무사히 바래다주고 안암동 나의 아지트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쓰러지곤 했다.
이론진부장 김창환이 당국의 수사에 겁을 먹었는지 자기는 몸이 좋지 못해 그같은 중책에 있다가 만일 체포당하는 날이면 솔직히 말해 당에 큰 피해를 끼칠까 염려된다고 휴직을 요청했다. 그러고는 이북으로 보내주도록 정태식에게 좀 잘 이야기해 달라고 나에게 사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형 김봉환은 월북해 경락의로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김창환의 이 말을 듣고 정태식이 그를 자기의 부책으로 발탁하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태식에게 김창환 이야기를 하니 정은 크게 낙담하며 『내가 그를 믿고 이론진부장까지 등용해 주었는데 결국 도망가려는가』하며 『이북으로 가는 것은 절대 안된다 하시오. 건강이 회복될때까지 어디 시골에 가서 숨어있으라 하시오』하고 화를 냈다.
『김창환은 지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해 있습니다. 지금 그가 체포되면 완전히 투항해 우리조직을 다 깨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를 일본으로 보냅시다. 일본에 가서 재정공작을 해오라는 임무를 줍시다. 그러면 당도 무사하고 김창환도 살 수 있지 않습니까』하고 나는 정태식을 설득했다.
『그래,동무 좋을대로 하시오. 김창환의 처리는 동무에게 맡기겠소』하며 정은 나의 의견을 접수했다.
사실 그전에 제주도 출신의 간부를 재정공작으로 일본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간 이후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김창환을 보내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 아니고 당성이 약한 자들을 안전지대로 떼어보내는 방책이었다.
김창환 대신으로 동경제대 출신의 신진균을 이론진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경북 영일 사람이었다.
이 무렵 이북에 있는 박헌영에게서 빨치산의 월동문제에 관한 특별지시가 서울의 김삼룡에게 왔다.
특히 지리산 빨치산의 월동문제를 검토해 도와줄 방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빨치산에 관한 것은 이주하의 담당사항이지 우리의 이론ㆍ기관지ㆍ선전부 블록 담당사항은 아니었다.
박헌영은 해방전의 지하조직 「서울 콤그룹」의 직계인 김삼룡ㆍ이관술ㆍ이현상 세사람중 이현상이 지도하고 있는 지리산 빨치산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삼룡도 「서울 콤그룹의 세동무」중에서 이관술은 이미 체포되어 옥중에 있고 남은 것은 이현상밖에 없으니 이현상을 구하려고 담당부서가 아닌 우리 이론진 블록에도 무슨 생각이 없는가 하고 문의해 왔다.
이에 대해 정태식은 그리 심각히 생각지도 않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는 『우리 조선인민의 역량은 무궁무진하여 어떠한 곤란도 극복하고 반드시 월동에 성공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대단히 낙관적이며 천진난만한 대학생의 작문같았다. 나는 처음부터 미군점령하에서는 빨치산투쟁이 성공못한다고 주장해 왔다.
유격전이란 광대한 도피처와 은닉처가 있어야 가능하다.
『적의 전선을 후방으로 만들고 적의 후방을 전선으로 변동시키며 먼저 농촌을 해방하여 근거지를 만들고 도시를 포위한다』는 모택동의 전략전술은 중국과 같이 몇만리라도 도주를 할 수 있는 나라에서 생겨난 전략전술이지 우리나라와 같이 백리도 도망갈 후방이 없는 곳에서,그것도 미군과 같이 세계제일의 항공병력과 기동력,통신기술을 가진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환경에서의 빨치산투쟁은 나에게는 부정적으로 보였다. 미국에 대해 남한주민의 입장을 이해시키는데는 총보다는 펜이 유효하며 파괴살상보다는 평화적인 데몬스트레이션이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신문기자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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