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문화cafe] 9·11 상처 보듬을 수 있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0면

출연: 니컬러스 케이지, 마이클 페냐, 마리아 벨로, 매기 질렌할
감독: 올리버 스톤
장르: 드라마
등급: 12세

20자평: 테러에 난타당한 미국사회를 지극히 미국적인 방식으로 위로한다

우선 좋은 쪽부터 보자.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대참사의 현장에서 살아난 것 자체가 희망임을 역설하는 휴먼드라마다. 주인공은 2001년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구조활동을 하려 달려간 경찰관. 평소처럼 남보다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한 경사 맥라글린(니컬러스 케이지)은 비행기 충돌소식을 듣고 네 명의 대원과 팀을 이뤄 건물 지하상가로 진입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펴기도 전에 이내 폭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 주위에 살아남은 것은 존과 윌 히메나(마이클 페냐)뿐. 잔해에 깔린 채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된 두 사람은 주기적으로 엄습하는 부상의 고통과 서로 고함치듯 주고받는 대화로 산지옥 같은 상황을 버텨간다. 이 지루하고 고독한 장면은 각각 가정에서 마음 졸이는 가족들의 모습과 교차된다. 물론 모두 완벽한 가정은 아니었다. 사랑했으면 사랑한 대로, 그렇지 못했으면 못한 대로 두 남자는 온갖 상념에 시달리면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 잔해 바깥에 있음을 확인한다.

나쁘게 보자면, 이 영화는 전혀 올리버 스톤의 작품답지 않다. 'JFK' '내쳐럴 본 킬러' 같은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접근으로 9.11 테러의 진상을 파헤치기 기대했다가는 크게 실망하기 알맞다. 테러가 왜 일어났는지, 누구 책임인지 영화는 관심이 없다. 그런 와중에도,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처하는 미국 사회의 허술함이 단편적으로 묘사되는 게 흥미롭다. 일례로, 두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정식 구조대원이 아니라 애국심에 불타 달려온 해병대 출신의 민간인이다. 모두 실존 인물들의 체험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지만, 현존 최고의 강대국이 국토의 심장부를 강타한 테러 때문에 맛봤던 무기력감이 내비친다.

불과 5년 전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에서 오락성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상영시간 대부분 어두컴컴한 건물 잔해 속에 누워있는 두 주인공은 영웅적인 활약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다. 실은 이들을 주인공으로 택한 것부터가 이 영화의 입장을 역설한다. 그렇게 하루 남짓을 버텨 살아 돌아와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올리버 스톤 감독은 불교신자로 알려졌지만, 이 신작을 소개하는 데는 성경 구절이 요긴하다. '애통해 하는 자는 복(福)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 말이다. 이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의, 그리고 미국 사회의 뛰어난 점을 꼽는다면 사건 후 겨우 5년 만에 이런 위로의 드라마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충무로와 비교하자면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6년 뒤에야 '꽃잎'이 나왔고, 삼풍백화점 붕괴의 상처는 10년 뒤인 지금에야 곧 개봉할 영화 '가을로'에 어른거리고 있으니.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