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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盧대통령, 제단에 몸 던지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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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대학 졸업생들이 평균 87대1의 경쟁률을 뚫어야 주요 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 딸의 난치병 수발을 더 감내할 수 없었던 한 아버지는 딸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반인륜적 행위를 하곤 통곡했다.

이렇게 암울하고 모진 사회 환경을 만든 뒤안길에는 정경유착에 의한 부패의 정치구조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권력자와 핵심 가신들, 잠재적 권력자의 주변 인사들, 그리고 기업인들이 조폭보다 더 질이 나쁜 뒷거래를 하고 있었다.

고 정몽헌 현대 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신 권노갑 전 의원에게 현금 2백억원과 미화 3천만달러(약 3백60억원)를, 또 다른 실세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2백억원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바쳤다.

손길승 SK 회장은 한나라당 선대위 재정위원장이었던 최돈웅 의원에게 현찰 1백억원을, 노무현 대통령의 집사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CD 11억원을, 대선 당시 이상수 민주당 사무총장에게 25억원을 주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이나 한적한 뒷골목에서 현금을 1백억원, 2백억원씩 주고받는 행태는 간첩 접선 방식을 뺨친다.

기업 중 현대나 SK만 그랬을 리도, 권력자의 측근 중 權.朴.李씨와 두 崔씨만 손을 넙죽 내밀었을 리도 없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 지사의 서울 관저에서는 돈다발이 서가 등에서 툭툭 떨어졌다는 증언도 있다. 대선이 끝나면 당선자와 측근들은 돈벼락에 시달린다는 얘기도 있다.

준 쪽은 검은 거래를 밝혔지만 받은 쪽은 한결같이 부인한다. 鄭회장은 남북 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4억5천만달러를 비밀 송금하고도 카지노 개설 등 현대의 대북 사업에 편의를 얻기 위해 금쪽 같은 8백60억원의 회사 공금을 金전대통령 측근들에게 헌납했다.

한마디로 현재 및 장래의 기대이익을 계산한 뇌물 성격이다. 기업인이 어떤 사람들인데 회사 공금을 횡령해 정치 잘 한다고, 잘 하라고 그냥 거액을 뭉텅 던지겠는가. 모두가 최고 권력자들의 환심을 미리 사기 위한 흉계다.

이러니 이 나라의 정치가, 경제가,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는가. 청운의 꿈에 불타야 할 청년들이 취업을 못해 주눅든 채 발이 닳도록 이 기업, 저 기업을 배회하고 있다. 극빈 계층은 사회 안전망의 울타리 바깥에서 몇푼의 돈에 살인까지 한다. 정치인과 기업인이 서로의 단맛만 추구하는 담합 행태를 오랫동안 유지해 온 결과다.

이 정경유착의 망국병을 혁파하지 않고는 이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盧대통령이 최도술씨의 비리 혐의가 드러나자 대경실색, 재신임을 묻겠다고 나선 것을 반전(反轉)의 적기로 삼아야 한다. 盧대통령은 위헌 논란을 부른 재신임 국민투표를 철회해야 한다.

그 대신 盧대통령은 정경유착과 부패정치의 악순환 구조를 끊는 패러다임 전환에 나서야 한다는 시대정신과 소명의식을 갖고 스스로의 말대로 희생의 제단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盧대통령이 먼저 지난 대선과 그 이후의 정치자금을 고백하라.

그리고 당당히 야당의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에게 따르라고 요구하라. 그런 연후 그 신물나는 부패정치의 검은 사슬을 끊는 방안을 세우고, 그것을 국민투표에 부치라.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그 과정과 해법엔 극심한 진통이 따를 것이다. 그것을 설득하고 극복하는 것이 나라의 진정한 지도자다.

盧대통령이 이렇게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로 나설 때 우리는 비로소 부민청국(富民淸國)의 기틀을 세울 것이다. 부결된다면 그때 바로 사임해도 늦지 않다. 그래도 그것은 부패와 불의의 정치를 끊기 위한 '장렬한 전사'로 청사에 기록될 것이고, 그야말로 죽어서 영원히 사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런 결단을 할 수 있는 지도자는 盧대통령뿐이다.

이수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