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큰 애국자가 되는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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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애국자가 있다. 작은 애국자와 큰 애국자, 이것은 특수 사정으로 분단국가에 사는 한 그렇다. 최근 나는 평양을 다녀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예부터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우리가 남부럽지 않게 잘 살게 되고 외국을 옆 동네 마을 다니듯 하게 되자 외국에 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급격히 퇴화했다. 애국이라는 낱말 자체가 왠지 뒤처진 듯한 느낌을 주는 첨단 글로벌 시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는 평양을 2박3일 일정으로 다녀왔고 그 후 내 입에선 '평양 갔다 오면 큰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뱅뱅 돌기 시작했다. 그건 순전히 엄앵란식 발음으로 내가 '맹글어' 낸 말이었다.

그간 평양은 나 혼자 다녀온 게 아니었다. 정주영 할아버지의 소떼 방문 이후 여러팀이 다녀왔다. 단지 나는 통일전망대와 판문점을 지나 원한의 38경계선을 직접 발로 밟고 넘어가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가는 최초 육로 방문단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남북으로 이어진 누런 흙길 위에 임시로 그어진 흰색 줄 하나를 넘어서니 거기가 이북이었다. 거기서부터는 북측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야 했고 평양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에 대비해 우리는 우선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원래 내 고향은 충청도가 아니라 황해도 남천이다. 50여년 만에 밟아본 북녘 내 고향 땅에서 내가 최초로 해낸 일은 화장실 용무를 본 것이었다. 바로 거기가 작은 애국자에서 큰 애국자로 변모되는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문제는 그쪽 화장실의 황당한 모양새였다.

아무리 간이화장실이라지만 논밭 둔덕 한편에 나무 말뚝을 박아 흰색 헝겊으로 가리개를 세우고 맨 흙바닥 위에 발판용으로 널빤지 서너개를 올려 놓은 게 전부였다. 만일 그게 북측 손님을 맞는 남측의 화장실이었더라면 '현대'라는 자본주의 개인회사가 번쩍번쩍한 화장실을 차려 놨거나 최소한 플라스틱 제품의 이동식 화장실이라도 세워 놨을 터였다.

북녘 땅을 밟은 지 채 5분도 안 되어 내가 찾아낸 큰 애국자가 되는 비결, 그것은 딱 한가지 '비교하지 말자'였다. '지금부터 내 사전에 비교라는 단어는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막다른 자구책이었다. 누가 믿겠는가.

판문점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네 시간가량 달려가면서 나는 버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단 한대의 민간 차량도 못 봤다. 깜빡 졸다가 깨어나 옆 친구에게 차가 지나가는 걸 봤는지 물어 봤지만 대답은 '노'였다. 당신 같으면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그리하여 이북에는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내가 만든 위대한 무비교적 철학 논리로 해석해 나갔다.

'아! 이북에서는 기름을 태우는 차를 사용하지 않는구나. 철저하게 환경우선주의로 나가는구나'.

임시로 마련된 고속도로 휴게실 진열장에 놓인 옹색한 북한산 제품을 들여다보며, 온통 벌거숭이인 산 밑으로 펼쳐지는 무미건조한 농촌 풍경을 보며, 을씨년스러운 평양의 낮과 밤을 보내며 나는 비교 자체를 제거한 내 두뇌의 철학적 용량을 한껏 부풀려 나갔다. 칠흑 같은 평양의 밤거리를 바라보며 '아! 이 캄캄한 밤에도 이곳 사람들한테는 위대한 영도자 동무가 태양보다 더 찬란한 빛을 비추어 주니 대낮처럼 밝게 살겠구나'.

뒤돌아보면 나의 피란 시절인 50~60년대는 그야말로 비교 대상이 없었던 시절이었고 그때 나는 등잔불 밑에서도 행복했고 배고플 때 메뚜기.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으면서도 무한히 행복했다. 요컨대 비교가 암이었다. '비교'가 죄를 잉태했다.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에 들렀을 때 거기 노동자의 월급이 6만원가량 된다는 설명을 듣고 나는 노후 대책으로 거기에 조영남 가구 공장을 차린다는 야무진 구상까지 펼쳤다. '한쪽을 사랑하면 작은 애국자, 양쪽을 다 사랑하면 큰 애국자다'. 이건 내가 만든 말이다. 황장엽 아저씨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든 말든.

조영남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