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칠레·미국 사이 '경계인'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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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란 단어에선 분단된 한반도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어쩔 수 없이 북녘 고향을 떠나야 했던 부모 세대도 떠오른다. 몸은 남쪽에 있지만 마음은 북쪽에 남아 있는 그 비극이란…. 저자도 이런 점을 의식했던 모양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남과 북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수십년 동안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온 한국 독자에게 의미하는 것과 판이하겠지만 나의 망명.독재.지구화의 경험과 이런 쟁점에 대한 문학의 탐구 방식이 독자의 정신과 마음에 울려퍼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인사말은 책의 전반을 아우른다. 남(빈국)과 북(부국)의 갈등, 동(사회주의)과 서(자본주의)의 대립으로 점철됐던 20세기가 선명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칠레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실천적 작가였던 저자의 기구한(상투적이지만 이만한 표현도 없다) 삶을 통해 그 모순이 표출되는 까닭에 꽤 실감나게 다가온다. 책에선 한반도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책장을 덮는 순간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동족 간에 피를 흘렸던 한국과 저 멀리 칠레의 극심했던 정치 불안은 '배다른 자식'이 아닌 것이다.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회고록이다. 그런데 특이하다. 자신이 지나온 길을 밋밋하게 돌아보는 대신 시공을 교차하며 20세기의 칠레, 나아가 미국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는 짜임새 덕분에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하다. "이런 회고록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발견의 기쁨이 있다.

정교한 형식에 답하듯 내용도 묵직하다. 세상에 의해 강요된- 일부 자발적 선택도 있지만- 방랑자의 고백이 메아리친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번민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펼쳐진다.

저자의 간단한 이력은 이렇다. 1942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 뉴욕으로 간다. 아르헨티나의 우경화가 깊어지면서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가 미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양키 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고 부모가 지어준 아리엘이란 이름대신 영어 이름 에드워드를 고집하던 소년은 10년 만에 그가 그토록 부정했던 남미(칠레)로 떠밀려간다. 마녀사냥과 같은 미국의 반공산주의(매카시즘) 기세 때문에 부모가 더 이상 미국에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스페인어를 죽도록 싫어했던, 그래서 영어를 숭상했던 소년에겐 칠레에 적응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이 없었다. 칠레의 궁핍한 경제, 또 이를 둘러싼 미국의 국제 전략에 눈을 뜬 그는 칠레의 무혈 사회주의 혁명에 가담하고 아옌데의 대통령 즉위에 환호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3년 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그는 다시 아르헨티나를 거쳐 미국 망명 길에 오른다.

책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났던 73년 9월 11일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가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갔던 어린 시절이 뒤따른다. 이후 그는 칠레와 미국 생활을 번갈아 돌아보며 혁명과 반혁명, 폭력과 평화, 민중과 지식인, 국가와 개인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천착한다.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했던 '잡종 인간'의 희비극을 들려주는 것이다.

우연히도 9월 11일은 2년 전 뉴욕 무역센터가 무너진 날. 그는 "이 엄청난 시련이 미국인에게 자기 인식의 기회, 즉 고통은 과거와 현재의 숱한 사람과 연결됐다는 점을 일깨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역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이라크에선 총성과 피울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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