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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가 자주적 실용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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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노무현 대통령의 한글날 경축사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한글 창제의 의미를 무리하게 해석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학계 일각에서 일고 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계급적 세계관'과 '자주적 실용주의'다. 노 대통령은 9일 세종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 제560돌 한글날 기념식에 참석, 세종대왕의 정치 철학을 설명하면서 "한글은 계급적 세계관을 뛰어넘어 백성을 하나로 아우르고자 했던 민본주의적 개혁 정치의 결정판이며, 자주적 실용주의와 창조 정신의 백미"라고 밝혔다. 이어 "만약 세종대왕께서 한자만을 고집했던 지배층에 굴복했다면 한글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계에선 한글 창제의 밑바탕에 세종의 애민(愛民) 정신이 깔린 건 분명하지만 이를 지배.피지배 같은 계급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창수 한성대(한국어문학부) 교수는 "세종이 상층부(양반)의 정보를 아래로 확산시켜 유교적 통치이념을 보다 굳건히 하려는 뜻에서 한글을 창제했다"며 "오늘날과 같은 계급 개념으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세종의 '모토'로 합리주의를 꼽았다. 그는 "세종은 한글은 물론 과학.음악 등을 우리 풍토에 맞게 고쳐 백성들이 편하게 지내도록 꾀했다"며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뜻에서 한글을 만든 건 아니다"고 밝혔다.

전상인 서울대(사회학) 교수도 "세종이 지배계급을 견제하기 위해 한글을 만든 건 사실이나 세종의 가장 큰 목적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왕의 뜻을 침투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며 "오늘날의 필요에 따라 과거를 자의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박호성 서강대(정치학) 교수는 노 대통령의 '자주적 실용주의'를 따지고 들었다. 박 교수는 "자주적 실용주의는 결과론적 얘기다. 세종 당대에는 자주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오늘날의 눈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건 호소력이 없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한글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문화운동이었다"고 못 박았다. 한글은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까지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통로 역할을 했으며 현대적 의미의 민본주의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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