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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게임」의 숨겨진 카드/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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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3년 미 국무부가 공개한 한국전쟁의 막후 휴전협상에 관한 50∼53년 사이의 기밀문서를 보면 60년대초부터 일기 시작한 중소 분쟁의 씨를 그때 이미 미국이 뿌리고 있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화전 양면의 메시지를 중국과 소련 외교채널로 계속 보내되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번갈아가면서 중국과 소련에 흘려보냈다. 이 기밀문서철은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과 소련사이에 상호 불신의 씨를 심어 언젠가 두 공산대국 사이의 불화가 분열의 수준으로 악화되는 것이 미국의 장기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 미국쪽 전략이 어느 정도 주효했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중소분쟁은 결국 72년의 닉슨 중국방문이라는 외교적 개가를 미국에 안겨줬다. 그리고 그후 고르바초프가 등장할때까지 미국외교는 이른바 「중국카드」를 가지고 소련을 움직이는데 유효한 지렛대로 활용했다.
키신저와 닉슨이 미중 관계개선을 이룩한 외교의 귀재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먼 눈으로 두 공산거인이 서로 앙숙이 되게 만드는 씨를 뿌린 미국무부 밀실의 이름없는 외교관들이 그 바탕을 은밀히 마련해준 것이다.
이 일화를 소개하는 것은 이런 강대국 외교의 장기적 포석에 익숙하지 못한 한국이 지금 동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되고 있는 거대한 외교 카드놀이에 제대로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휘말려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노대통령의 대미·소 정상접촉은 강대국 외교게임의 바람을 한반도에 몰고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사자인 남북한은 물론 이 지역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미·소·중·일 등 주변국가들이 한소 정상회담이 갑작스레 열린 것을 신호로 갖가지 카드를 뒤섞어가며 외교의 표리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구한말과 해방 전후해서 강대국 카드놀이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들의 희생물이 되었던 뼈저린 체험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냉전구조 와해의 결과로 어렵게 찾아온 외교주역으로서의 기회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표면과 뒷면을 철저히 꿰뚫어보는 조심성과 성숙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강대국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데 대해 순진하게 축배만 들게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호의를 보이는지 냉엄하게 계산하고 그들이 감추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노력이 뒤따라야될 것이다.
미국은 이번 정상회담이 미소 정상회담 직후 자기나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주선해 줌으로써 의외의 카드를 드러내 보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소련이 한국을 택하든,일본을 택하든간에 미국이 2차대전이래 구축해 놓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독점적 경제·군사·정치권에 소련이 발을 들여놓을 발판을 구축하는데는 미국이 저항감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감각에서 보면 이번에 미국이 담당한 역할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소련이 의도하는 대로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미끼로 일본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이를통해 소련이 동아시아 경제권에 새 주역의 하나로 진출할 단계가 와도 미국이 이번에 보인 카드는 계속 유효할 것인가.
소련은 곰에 비유되는 전통적인 상대로 이번에도 그림이 명확지 않은 카드를 드러내 보였다.
실에 있어서는 훨씬 더 적극적 이었으면서도 형식에 있어서는 무례할 만큼 소극적 태도로 이번 정상회담에 임했다. 그들은 서로 대사를 소환할 정도로 북한측 불만을 무릅썼으면서도 정상회담후의 발표문을 보면 「잠깐 만나자는 전갈」을 받고 「통상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 만났다고 딴전을 피우고 있다.
소련이 숨겨놓고 있는 카드는 무엇인가. 한소간의 수교와 본격적 시베리아 합작개발인가,아니면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성동성서 전법인가.
중국은 그들대로 실리가 담긴 남한이 소련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꿀먹은 벙어리처럼 보고만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은 소련이 먼저 한국과 수교한 후 북한의 반응이 어느 정도인지를 지켜본 후에 자기들의 행동을 결정하려하고 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각국의 계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숨겨진 카드를 마련하고 있을까. 북방외교의 성과와 한소 정상회담의 성사 앞에서 있는 카드를 모조리 드러내 놓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정부는 앞으로 주변 세력들이 취할 온갖 가능한 외교적 카드놀이에 대응할 우리 나름의 카드를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이 너무 쉽게,예상보다 잘 풀려나갔다고 낙관한다면 그것은 다른 주역들이 움켜쥐고 있는 숨은 카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분위기에 너무 들뜨지 말고 이런 가능성을 차분히 생각해 볼때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이번 한소 정상회담은 가능성만 무수히 던져줬을 뿐 구체적 과실이 손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가능성을 구체적 과실로 성숙시키는 작업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중요한 시기를 맞아 우리는 강대국 외교 카드놀이의 복선을 면밀히 읽어가면서 독자외교의 기술을 축적하는 계기로 활용해야할 것이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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