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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노랫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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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곧 발표될 노벨 문학상의 단골 후보 가운데 특이한 인물이 있다. 포크 가수 밥 딜런이 그 주인공이다. 일상에 대한 성찰과 은유적 메시지를 담은 노랫말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한 평론가들이 10여 년째 그를 추천하고 있다. 대학 교재로 유명한 노턴 출판사의 '문학개론'에 그의 노랫말이 실린 건 이미 오래전이다.

잘 만들어진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그 아름다움이 시에 뒤지지 않는다. 노랫말의 미덕은 진솔함에 있다. '잊혀진 계절' '모닥불' 등 3000여 곡을 쓴 작사가 박건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노랫말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삶이 바르게 보이는 자리에 서서 감정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노래했다면 그것이 바로 시"라고 한 유종화 시인의 말과도 일치한다. 그런 노랫말이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와 어우러져 명곡이 되고 가장 솔직한 시대의 증언자로 남는다.

우리 대중가요사에도 명곡.명가사가 많았다. 거친 광야로 나아가는 비장한 순간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을 포착한 김민기의 감수성은 번뜩였다. 대중가요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풀어낼 땐 격정적이되 천박하지 않았다.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달빛 아래 고요히/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오/내 더운 가슴 안아 주오//(정태춘.박은옥 '사랑하는 이에게')

언제부턴가 그런 아름다운 노랫말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서정성과는 거리가 먼 직설적 표현 일색인 것은 요즘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어로 뒤범벅되고 글로 옮기기 민망한 비속어와 서양 욕설까지 등장하는 노랫말은 어떻게 봐야 할까.

한 음악 채널의 지난주 인기 가요 30곡 가운데 16곡은 제목만으론 국적을 분간하기 힘든 곡이다. 'Keep Holding U' 'We Belong Together' 등과 함께 'D-LIP ver. 1'이란 알쏭달쏭한 제목도 있다. 비교 삼아 1985년의 인기 가요 순위를 찾아봤더니 전혀 딴 세상이다. '어제오늘 그리고' '희나리' '바위섬' 등 상위 20곡 가운데 영어 이니셜을 쓴 'J 그대는'이 유일한 예외랄까.

560년 전 오늘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대왕은 '정간보'란 악보를 창안하고 예악(禮樂)을 정비한,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임금이었다. 국적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글 파괴'를 일삼는 후손을 그래도 어여삐 여기실지 송구하기 짝이 없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