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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파리 문서(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이 러시아의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마 17세기 스파파리란 러시아외교관이 쓴 『시베리아와 중국』이란 문서가 아닌가 싶다.
스파파리는 러시아와 청국의 외교,통상 관계 수립을 위해 청국에 파견된 러시아의 사절이었다. 그는 1675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북경을 방문하고 장장 2년 10개월만에 귀국하여 외교복명서,여행기,중국지지등을 통해 동아시아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스파파리의 저술속에 조선왕국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조선의 지리,국호,정치체제,풍속과 물산등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스파파리가 북경으로 떠날 때 러시아외무성이 그에게 건네준 청국주변지역의 정보에는 몽고,일본,대만등은 들어 있었지만 조선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스파파리의 문서는 러시아에 있어 최초의 한국소개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스파파리는 중국행이후 시베리아,동아시아지도도 제작했는데 그 지도에 「카레이스코예 고수다르스트보」라 하여 「조선국」을 명시하기도 했다.
스파파리의 조선에 관한 기록과 지도는 사실은 중국에 와있던 야소회선교사 M 마르티니의 저서 『중국신지도첩』 가운데 해당부문을 옮겨 실은 것이지만,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될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러시아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해마다 몇차례씩 북경을 다녀오는 사은사들의 기록인 『연행록』등을 통해서지만 초기의 기록들은 단편적이고 부정확한 것이 적지 않았다.
가령 1685년 북경에 갔었던 남구만은 같은 러시아인 「아라사」와 「대비」를 별개의 나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 러시아는 중국의 서북에 위치하며 서역에서 2만리 거리에 있고 사람들의 생김새는 크고 못생겼으며 중국땅보다 크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19세기 이르러서는 그들과의 필담(한자)을 통해 지리와 풍속,심지어 황제의 성이 나마낙복(로마노프)라는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청의 『세조실록』에 기술된 1652년의 흑룡강 전투에서 처음 해후한 러시아는 1860년에 우리와 국경을 맞대면서부터 이제는 떼어놓을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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