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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무슨달] 下. 달과 미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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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는 그의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불쌍한 달…."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주인공 다혜는 달을 보며 짝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심정을 이렇게 읊조립니다.

다혜에게 달은, 관심 받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일 겁니다. 같은 달이라 해도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달은 수천 수만 가지 느낌을 발산합니다.

달의 정령을 화폭에 담은 예술가들은 어땠을까요. 화목한 가정을 일궜던 화가 장욱진에게 정겹고 따스했던 달이, 배고픔과 고독의 생을 보낸 이중섭에게는 스산한 달로 바뀝니다. 여기,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부터 사진가 구본창까지 우리 시대 작가들이 바라본 달이 두둥실 떴습니다.

여러분에겐 여기 이 달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글=박지영 기자 <nazang@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까만 어둠 저편에 발광하는 '하나의 돌'은 보는 이의 심장에 그대로 와 박히면서 장엄한 구경거리를 선사한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번지는 빛으로 인해 달은 강력한 볼거리가 돼 무한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밤 하늘은 최초의 화폭이며, 달과 별은 모든 이미지의 시작이다.

무엇보다도 달 표면에 나타난 음영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동시에 온갖 전설과 신화를 창조해 냈다. 회화와 문학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어둠을 구원하고 중력에 저당잡힌 이 현실 세계 너머를 꿈꾸게 해준 것은 달이었다. 달은 늘 그리움과 몽상, 희망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다.

조선시대 인물 산수화에는 달을 쳐다보는 선비들의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이는 자연의 순환하는 이치와 질서를 깨닫고 헤아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탈속과 자연회귀의 의미 역시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사군자의 매화 그림 또한 으스름한 달빛에 피어 있는 모습이 제격이다. 은은한 달빛에 번지는 매화향기는 맑은 절개를 뜻했다.

조명시설이 아쉬웠던 그 옛날, 창으로 휘영청 스며드는 달빛이 방안에 놓인 백자의 표면에 반사돼 부서지면 방안은 은은한 빛으로 환해졌다. 달을 실내로 끌어들인 이 자연과의 친연성이 마냥 놀랍다. 달빛으로 절정의 자태를 뽐내는 조선 백자를 훗날 사람들이 달항아리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과 백자의 연관성은 김환기의 그림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평생 달과 항아리를 그리워하고 이를 푸른색 화폭에 담근 작가다. 그에게 달과 항아리는 연인이었다.

사실 달빛은 남녀의 사랑에는 더 없는 은총이다. '달빛 침침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라는 시가 붙은 '월하정인(月下情人)'은 신윤복의 그림이다. 여기서 삼경(三更)이란 지금 시간으로 치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로 한밤중이다. 당시엔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할 익명의 공간이 없었기에 이처럼 흐릿한 달빛에 의지해 밤거리에서 은밀히 만나 정을 나누고 있다.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는 성긴 숲에 걸린 밝은 달만을 그린 적조한 풍경이지만 한국 산야의 특성을 절묘하게 드러낸 그림이다. 그것은 동시에 허정(虛靜)의 황홀, 세상에 지친 이가 마음속에서 그 세상을 힘껏 지워낸 자취이기도 하다.

이중섭의 '달과 까마귀'는 그가 월남 이후 처음으로 안정을 찾았던 통영 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전선 위의 까마귀들이 격렬하면서도 스산하게 표현돼 당시의 시대적 편린과 함께 자전적 사연이 슬쩍 묻어난다.

달은 어딘지 쓸쓸하고 아련하고 슬프고 적막해야 제맛이다. 지치고 힘들고 고독한 이들이 고개를 들어 저 달을 본다. 거기 위안처럼 달이 떠있다.

박영택 (미술평론가.경기대 미술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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