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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나침반] 'KBS 가을 편성' 연예인에 너무 의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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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제작을 요리에 비긴다면 편성은 식단을 짜는 일과 비슷하다. 아무리 맛과 영양이 풍부한 요리를 만들어도 식단에 오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따라서 편성 담당은 영양사의 안목과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 단지 빛깔과 냄새, 혹은 저렴한 재료비가 식단 구성의 요건이 돼서는 곤란하다.

구내식당도 봄.가을에 한번씩 개편을 한다. 고객의 입맛에 맞는 계절음식도 추가하고 보양식도 선보인다. 늘 내놓는 밑반찬의 재료도 조금 바꾸어 변화를 준다. 단골손님을 포함한 고객의 품평도 고려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손님을 늘리려면 그들이 음식 섭취를 통해 사는 맛과 멋, 아울러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음식 맛에 반해서 온다는 손님의 요구에 맞장구치며 인공감미료를 듬뿍 치는 일에 과감해서는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너무 짜거나 너무 달아서는 안 된다. 물론 건강을 고려한 식단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맛이 없어서 손님이 줄 수도 있다. 결국은 맛과 영양을 고려한 다양한 음식이 손님을 끌어당기고 또 오래도록 발길을 머물게 한다.

KBS가 마련한 2003년 가을 식단(편성표)을 보면 영양사의 고민이 가로 세로로 두루 읽힌다. 1TV의 'TV문화지대'는 늦은 밤의 야식 같은 프로그램이다. 대중문화의 달콤함보다는 클래식의 새콤함이 요리의 포인트다. 유인촌씨가 진행하는 '신화창조의 비밀'은 현대사에 기록될 만한 성공신화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또 하나의 '역사스페셜'이다. 2TV는 거의 신장개업에 가까운 개편을 단행한다. 제목만으로도 포만감을 가질 만한 메뉴가 즐비하다.

'행복충전! 백세인'과 '일요일은 101퍼센트'는 고단하고 허한 속을 꽉 채워줄 것 같고 '체감경제 황금의 시간'과 '성공예감 경제특종' 등을 펼치면 쪼그라든 경제가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한 예감이 든다. '학교야 놀자'와 '대한민국 1교시'를 보면 문제 많은 대한민국 교육이 가뿐하게 되살아날 것도 같다.

한결같이 재미있는 사람(인기인)이 의미 있는 내용(문화.경제.교육)을 말하는 방식, 이른바 당의정 같은 프로들이다. 큰 틀에서 보면 맛(재미)과 영양(정보)이 어우러진 음식(프로그램)들인데 왠지 의도는 고상하나 그 방법은 약간 고루한 느낌을 준다. 일단 '외피'로 눈길을 끌고 그 다음에 '알찬' 내용으로 마음을 잡아보겠다는 것인데 과연 이 배가 쾌속 항진할지는 미지수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재미의 틀이 반드시 필요하다. 장기기획팀이 가동된다고 하는데 그들은 연예인 의존도가 낮으면서도 재미가 담보되는 프로들을 개발하는 일에 주력하기 바란다.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맛은 좋고 빛깔은 요란하지만 먹은 후 식중독을 일으키는 음식들을 밥상에 올려서는 안 된다. KBS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이라고 노래(ID송)를 부른다. 모름지기 정성에는 정보와 정서와 정기가 깃들어야 한다. 개편은 일종의 개혁이다. 개혁의 피로감이 늦게 오려면 요리사도 영양사도 느긋해야 한다. 개편에 포함된 '스펀지'라는 제목을 보며 이제는 용수철 같은 프로그램보다 스펀지 같은 프로그램이 오래 가기를 기대해 본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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