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이젠 내일이 중요하다”/김영희(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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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경서 본 「통석」이후의 양국관계
한일간 과거청산의 과정을 보면 인간이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아키히토 일왕이 마치 동화속의 그림같은 분위기의 궁중만찬에서 「보통사람」을 자처하는 우리 대통령에게 「통석의 염」이라는 고풍스럽고 모호한 말로 일제의 악정 36년을 둘러싼 45년간의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표현이 현실감이 없고,지극히 관념적인 것이라도 구름위에 사는 「상징천황」이 그정도로 말했으면 세속의 인간들은 그것을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솔직한 사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인 처사요,국익에도 부합되는 일이라고 하니 국민들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겠다.
그리고 일왕의 「말씀」이 사과로서는 미흡한 구석이 있다면 모자라는 부분은 가이후총리의 「겸허한 반성과 솔직한 사과」로 보완된다는 것이 우리 정부가 미리 정해놓은 방침인 것 같다.
일본의 조야,언론들은 국민주권의 상징으로서의 일왕의 공식활동에 정치적인 의미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통석의 염」을 표현한 그의 「말씀」은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안에서는 가장 강도 높은 사과라고 말한다.
일본사람들의 이런 논리를 한국의 논리로 뒤집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왕의 헌법에 소상한 지식이 없는 악정 36년의 피해자인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일왕의 사과는 처음부터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국왕을 포함한 일본측의 사과를 만족스럽다고 말한 노대통령이나 외무부당국자의 만족과 한국국민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의 결과 사이에는 너무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민자당의 김종필 최고위원의 논평이 현실적인 것 같다. 그는 일왕의 「말씀」이 뉘우친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고 전제하고,그러나 외교상의 특수성을 감안해 사과로 수용할만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외교적인 특수성­이것은 고도의 이성을 가진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 같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적 변혁의 물결을 타고 있다. 웬만하면 과거를 털고 가능한 모든 동반자들과 손을 잡고 전환기의 도전을 극복하고 21세기를 맞아야할 처지에 있다. 일본과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한일 양국의 당국자들에게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일왕의 사과가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이 변혁기에 미래지향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한일간의 과거는 청산된 것으로 일단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노대통령이 방일의 전제에 관해 충분한 논의 없이 방일강행을 발표하며 퇴로를 스스로 차단한 것은 일왕이 하고 많은 쉬운 표현 다 놓아두고 고색창연한 어구를 선택한 것과 함께 그야말로 「통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세계사의 큰 흐름을 생각해야 할 때다. 그렇다고 우리정부가 21세기니,태평양시대니 하는 거창하고 구름잡는식의 수사로 국민들에게 최면을 걸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21세기 보다는 당장 오늘 고통받는 동포들의 삶을 개선하고 무역불균형을 시정하는 일에 일왕의 성의있는 실천을 촉구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실속 없고 분수 모르는 오만한 자세다. 다른 아시아사람에게는 너무 일찍 터뜨린 샴페인에 취한 사람의 객쩍은 소리로나 들릴 언사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이 시기에 한일정상회담을 포함한 관계개선을 갈망하는 배경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서울∼부산간의 고속전철을 따내는 일,영화를 포함한 대한 문화진출의 길을 트는 일에 관심이 크다. 그러나 거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한국의 북방외교의 관련된 정치적 타산이다.
일소관계를 보자. 소련이 북방영토문제에서 양보를 하지 않는한 일본의 대소경협,특히 시베리아개발 참여는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련은 한국과의 관계개선,경제협력을 서둘러 일본을 상대로 「한국카드」를 쓰고 있다.
한일관계는 불행했던 과거에 묶여있는 사이에 남북한관계에 돌파구가 열리고 현재의 한중경협에 박차가 가해진다면 그것은 일본의 고립을 의미한다. 「하나의 유럽」이 등장하려는 시점에서 이런 사태는 일본에는 너무 큰 부담이 된다.
노대통령의 방일중에 한국이 많은 요구조건을 제시하는데도 일본이 구체적인 요구나 제안을 내놓지 않은 배경도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노대통령의 방일은 너무 성급하게,그리고 너무 싸게 팔아넘긴 「외교보따리」같기도 하다.
노대통령은 일본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과거는 청산되었다고 선언했다. 외무부 당국자도 만족을 표했다.
정부는 일본의 구체적이고 성의있는 약속 이행을 계속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 한국국민들은 정부의 대일자세를 「감시」할 것이다.
야당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다시,보다 솔직한 일왕의 사과를 받아내자는 것은 현실성 없는 감정론이 되어 버렸다. 노대통령의 방일과 일왕의 발언은 싫건 좋건간에 이제 두나라 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밖에 없다.
한일간의 과거도 5공처럼 너무 인위적으로,그리고 달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청산되고 있다. 현실정치는 우리에게 감정의 자제와 대승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노대통령의 방일기간중 동경의 큰 서점에서 한국말 교재가 많이 팔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이 일본사람들간에 왜곡된 과거의 굴레를 벗고 한국을 바로 알려는 노력이 확산되는 징조라면 우리쪽에서도 「피해자의 아량」을 보일 때라고 생각된다.〈본사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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