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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대물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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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시가(滋賀)현의 니시노코 호수변에 세계 유일의 갈대 박물관이 있다. 말이 박물관이지 좁고 허름한 농가 창고를 개조한 것이다. 입장료도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남미 대륙까지 누비며 수집한 전시품 5000여 점의 면면은 녹록지 않다. 갈대로 만든 종이에 쓴 고문서, 갈대 펜으로 그린 고흐의 습작과 함께 갈대 문양이 새겨진 조선시대 도자기도 전시대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도쿄대 의학부를 나온 전직 교수 니시카와 요시히로가 2001년 고향 집에 이 박물관을 연 것은 400년간 17대째 이어온 가업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에서였다. 그의 집안은 집 앞 호수에 지천으로 자라는 갈대로 목조 가옥의 지붕재나 여름철 생필품인 발(簾), 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니시카와 상점'을 대물림해 왔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게를 일본에선 '시니세(老鋪)'라 부른다. 창업 100년, 4~5대 대물림은 되어야 명함을 낼까 말까 할 정도다. 대대손손 한 분야만 파고들어 일가의 경지를 이루는 장인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세계를 휘어잡는 일본 제조업 신화의 원동력이다.

가부키나 스모 등 전통 기예 분야에선 기능과 함께 이름까지 물려받는 습명(襲名)이 제도화돼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 심수관의 15대 후손이 지금도 같은 이름을 쓰는 연유다. 자녀 중에 마땅한 후계자가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대를 잇는다. "자식에게만은 험한 일을 시킬 수 없다"는 한국인과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이다.

대물림에 관한 한 일본 정치를 빼놓기 힘들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신임 총리를 비롯해 하시모토-오부치-고이즈미 등 1990년대 이후의 총리들은 대물림 정치인 일색이다. 자민당 현역 중의원 292명 가운데 38%는 아버지의 지역구와 후원회 조직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당선된 '세습 의원'이다. 2003년 총선 때는 그 비율이 45%에 이르렀다. 나가노(長野)현 고사카(小坂) 집안의 족보는 일본 의정사와 궤를 같이한다. 의회가 처음 구성된 1890년부터 지금까지 4대에 걸쳐 지역구를 물려가며 아성을 쌓았다.

대물림을 존중하는 전통이 정치에까지 파급된 결과다. 하지만 정치가 특정 가문의 독과점 가업으로 변질되는 순간 참여민주주의는 설 땅이 좁아진다. 다양한 인재 공급원이 차단되면 정치는 폐쇄회로에 갇히고 만다. 정치의 대물림은 그래서 아름답지 못하다. 아사히 신문이 2003년 총선 때 "세습, 정치는 전통 예능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로 통박했던 기억이 새롭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