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한일관계 말하는 전해종교수(일요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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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왕사과」만이 응어리 푼다”/죄책감 약한 일 국민의식 문제/우리측 대응 호흡짧아 큰걱정
오는 24일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일제 침략피해에 대한 일왕의 사과문제가 한일간의 외교적ㆍ국민감정적 마찰까지 빚고 있다.
일 정부와 자민당은 아키히토 일왕의 사과수준은 히로히토 일왕의 유감표명 이상이 되어선 안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우리정부와 국민은 보다 명백한 사죄의 뜻이 표명돼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일제의 명명백백한 침략과 그로 인한 우리국민의 희생에 대해 일왕이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사죄를 할 수 없다는 논리는 반성이 부족한 일본의 역사관과 국민의식과도 연관돼 있다.
실제로 일본 상지대의 와타나베교수같은 이는 신문 기고문을 통해 『히로히토 일왕의 말씀을 바꾸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공개적으로 강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일제의 한반도침략의 역사성과 일왕 사과의 필연성등에 관해 학술원회원이자 국제역사학회의 한국 위원장인 원로역사학자 전해종교수(70ㆍ동양사전공)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서울대와 서강대 교수를 거쳐 지난 85년 정년퇴직한 뒤 인하대 대학원에 출강하며 언론접촉등을 삼가온 전교수는 일왕의 사죄관련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 문제라면 한마디 해야겠다』며 선선히 응했다.
­일본측은 과거사에 대한 사죄는 총리가 하면 되고 일왕은 유감표명등 모호한 표현이상은 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일왕이 구체적 사죄를 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36년간 한반도를 강점,주권을 유린하고 태평양전쟁동안 징병ㆍ징용ㆍ정신대 등으로 우리민족에 2백여만명의 사상자를 내게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은 「일본왕」의 이름으로 이뤄졌습니다.
수십만명의 우리 청년ㆍ처녀들이 일왕의 칙서 한장에 전쟁터로,정신대로 끌려나갔고 그가 선전포고한 전쟁에서 희생됐습니다. 일왕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의 처방도 일왕이 해야 합니다.
­현재의 일왕은 평화헌법에 의해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니까 국민대표인 총리의 사과로 충분하다는 게 일본측 논리인데요.
▲일왕의 사죄는 잘못된 과거를 가해자측이 반성한다는 뜻과 함께 피해자인 우리국민 감정의 응어리를 푼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황국신민맹세와 함께 궁성예배를 아침마다 해야했던 식민지 경험을 가진 우리국민에게 일왕은 대표적 상징입니다.
아키히토 일왕은 당시의 왕이 아니라고 하지만 히로히토 왕을 승계하고 지금도 일본국의 상징인 그가 일본이 저지른 죄를 사죄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 정부와 일왕이 군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해야 한다는 올바른 역사인식만 갖고 있다면 말입니다.
­일본측의 과거사에 대한 역사의식은 어떻습니까.
▲실제로 와타나베교수뿐 아니라 일부 학자들 가운데도 일제의 식민지배는 공과가 함께 있었다며 큰 잘못이 없었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이들이 일왕을 굳이 보호하려는 저변에는 군국주의까지는 몰라도 위험한 우익적 발상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 볼 때가 있습니다.
일 자민당내의 소위 지한파라는 사람들이 특히 일왕을 싸고도는 것은 황국사관식 발상을 가지고 있는 탓이 아닐까요.
­일왕은 아니라도 일본총리들은 사죄의 뜻을 여러차례 표명했습니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욱 상징적 존재인 왕이 분명한 사과발언을 못할 이유가 없죠. 왕이 사과하면 체면이 깎인다는 그 저변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단 말입니까.
­일본 국민 일반에게는 근대의 침략에 대한 바른 역사의식이나 죄책감이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근세이후에 대해서는 간략한 사실기록이 있을 뿐 자신들의 역사적 범죄에 대해선 별로 언급이 없습니다. 게다가 대입위주의 고교교육이어서 입시에 근세사는 거의 출제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교과서왜곡이 아직도 문제가 되고있는 형편이니까 특히 일본의 젊은층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지식자체가 극히 부족한 실정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 문화의 특징중 하나가 「수치의 문화」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할복까지 하지만 들키지만 않는다면 자책감없이 넘어가는 특이한 사고방식이지요.
과거사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하는 것은 경제대국화한 일본이 신 일본주의라고 해서 위험스러운 우경적 발상을 가지려고 하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를 이웃나라들에게 주게 됩니다. 신사참배가 논의되고 일왕을 다시 신성화하려는 데 대해 불안해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국제정치적 감각이 문제군요.
▲일본이 의회정치가 발달한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민주주의와 상대방의 인권보장등 서구식의 기본적 가치를 어느정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는지 의심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인권이 여전히 문제가 되는 까닭이지요. 「이기면 관군이 되고 지면 적이 된다」는 일본 속담이 있듯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사고방식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일본의 전통이 지금도 달라졌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2차대전때 전쟁피해를 준 데 대해 다른 나라들이 명백한 사죄를 표명한 것과도 좋은 대조가 됩니다. 지난 85년 서독의 바이츠제커대통령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다시 깊이 사죄했고 지난 4월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시대의 폴란드장교 학살을 나치독일이 아닌 자신들의 범죄임을 시인하고 깊이 사과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정부가 취한 태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일본의 기본적 속성을 잘 알고 대일 관계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긴요합니다. 너무 호흡들이 짧은 것 같습니다. 일왕의 사과도 노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시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서둘러 추진된 느낌이 있습니다.
방일시에 사죄가 부족할 경우 노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분명한 사죄를 요구하는 것도 일본측에 큰 압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또 일본의 잘못에 관한 사죄방법을 공동논의하고 그런 전제위에서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논의할 양국간 공동협의체를 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과거사 문제에 감정적으로만 집착하고 있을 수는 없지만 역사를 매듭짓는다는 것은 양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대담=조현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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