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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여론 앞세운 노 대통령식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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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분양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다. 장사는 열 배 남는 장사도 있고, 열 배 밑지는 장사도 있다"(2004년 6월 9일 민주노동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분양원가 공개"로 선회했다. "분양원가 공개는 시장원리에 맞지 않고 실익도 없다"던 정부도 "이르면 내년 4월부터 분양원가를 공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어떤 사정으로 2년여 만에 대통령과 정부가 입장을 완전히 바꾼 것일까. 판교 신도시와 파주, 은평 뉴타운 등의 고분양가 논란이 한 원인으로 꼽힐 수 있다. 판교 중대형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가 1800만원까지 치솟자 "정부가 분양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판교 분양가는 채권입찰제 때문에 높아진 것이라는 건교부의 해명은 먹혀들지 않았다. 이어 파주와 은평뉴타운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고분양가 문제가 불거지자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원가 공개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하지만 분양원가 공개를 둘러싼 논란은 지금보다 2004년에 더 뜨거웠다. 지금 갑자기 대통령과 정부가 태도를 바꿀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경이 포퓰리즘적 결정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원가 공개를 바라는 여론을)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본다"는 대통령의 발언에서 나타나듯 국민 여론을 내세워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원가 공개에 대한 찬반 양론을 대립시키려는 정치적 노림수라는 뜻이다.

대통령이 원가 공개의 문제점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원가 공개를 결정한 것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도 이번 결정의 배경을 궁금하게 한다. 대통령은 ▶원가 공개 후 미분양 때문에 기업이 적자가 나면 정부가 물어줘야 하는지▶주공 등 공공기관의 이윤이 박해질 경우 임대주택 사업 등 공공사업에 차질이 빚어지는 문제점▶민간업체의 주택 공급 감소 우려 등 원가 공개의 부작용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반면 왜 원가를 공개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말뿐이다.

일각에선 대통령이 부동산 정책 실패의 원인을 고분양가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예상대로 안정되지 않자 급기야 고분양가에 집값 불안의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지적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결정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윤태영 대변인은 "2004년 당시엔 개인 소신으로 반대했지만 당에서 계속 공개를 주장해 나중에 유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건교부가 발표한 대책은 급조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토론회에서 대통령이 언급하기까지 정부와 청와대가 구체적으로 분양원가 공개에 대해 협의한 적이 없다"며 "대통령 발언 이후 급하게 정책 협의를 통해 건교부가 향후 대책을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승희.김준현 기자

◆ 분양원가=분양원가는 아파트를 지을 때 들어가는 택지비와 공사비.설계비.부대비용 등을 말한다. 현재 주택법은 공공택지에서 건설되는 주택에 대해 택지비.직접공사비.간접공사비.설계비.감리비.부대비용.가산비 등 7개 항목(전용 25.7평 초과 민영주택은 택지비와 택지매입원가 등 2개 항목)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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