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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특별취재팀 50일간 현장을 가다(11)|중남미 영광과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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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중남미 3대 고유문명의 하나인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페루의 수도 리마시 중심가를 들어서면 잠시 신호대기중인승용차나 택시에 몇십명씩 몰려들어 전자계산기를 들이미는 진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전자계산기를 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까이 접근해서 보면 『돌라르, 돌라르 (달러) 』를 외치며 달러를 사겠다는 달러장사들임을 알게된다.
서로가 가격경쟁을 하기 때문에 말로 흥정을 하지 않고 전자계산기에 달러당 얼마를 주겠다는 가격을 제시하면서 행인들과 거래를 한다는 것이 현지안내인의 설명이다.
이른바 환투기라고 부르는 투기행위가 페루의 심장부에서 백주에 공공연히 활개를 치고있는 것이다.
중남미국가들은 대체로 오래 전부터 망국적인 환투기의기본무대가 되는 달러의 개인 보유를 미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자유화해오고 있다.
한국의 부동산투기보다 훨씬 더 보편화돼있는 이 같은 환투기는 비단 페루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브라질·멕시코 등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기인기」 1호의 고질적인 열병이다.

<국민관심사 1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시내 중심부곳곳에 시시각각 변하는 환율을 재빠르게 공시하는 TV 모니터들이 있는데 그 주변에는 워키토키·핸드폰(휴대용전화기) 까지 동원한 환투기꾼들이 장사진을 이루고있다.
브라질에서는 TV·라디오 등이 매시간 뉴스를 통해 환율을 보도하고 있고 심지어 음악방송에서 조차도 달러 값을 알려줄 만큼 달러시세는 범국민적 관심사가 돼있다.
따라서 봉급생활자·식료품소매상에서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싼값에 달러를 사들여 보다 비싼 값으로 파느냐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운다.
특히 투기의 규모가 큰 이른바 큰손들인 기업들은 이 같은 환차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정부의 고관들을 매수하거나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있다.
실례로 지난 2월 아르헨티나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대통령궁 도청장치 발견사건이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예다.
사건의 발단은 대통령경호실측이 각종 시설물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집무실을 비롯, 회의장 등 7군데에 도청강치가 부착돼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비롯됐다.
국가의 주요정책과 극비사항들이 대통령궁에 부착된 도청강치를 통해 낱낱이 누설됐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허락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할 만큼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7군데나 도청장치를 부착했다는 사실이 더욱 그러했다.
결국 국가정보기관까지 총동원, 수사를 편 결과 정부의 주요정책을 사전에 빼내 기업의 전략수립에 활용할 목적으로 대기업들이 치밀한 작전 하에 저지른 소행임이 드러났다.
환투기가 얼마만큼 극성을 부리고 있고 국가전체가 이로 인해 어느 정도 병들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 국민이 이처럼 환투기에 골몰하기 때문에 투기에 투입되는 액수도 초대형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지난해 l2월말 1달러에 1천2백아우스트랄 하던 환율이 연초 2천아우스트랄로 폭등할 당시 하룻 동안의 거래량이 5억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또 브라질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금년 2월까지 약2개월간에 걸쳐 환투기로 3억달러의 순이익을 챙긴 기업들을 적발, 정부가 이들 기업들이 탈세·수입달러 불법태환 등의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했는가의 여부를 수사중이다.
뿐만아니라 일부 대기업들은 외국거래업체로부터 비밀리에 달러를 들여와 자국은행에 예치해놓고 엄청난 이득을 취하기도 하며 통상 1개월로 돼있는 수입대금 결제기간을 3개월로 연장하면서 그 돈을 환투기에 활용, 2∼3배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달러 값이 늘 오르는 것만은 아니다. 정부정책에 따라 심할 때는 20∼30%씩 떨어지기도 한다. 여기에 투기의 여백이 있는 것이다.
브라질의 한 전자제품 수입상의 실전담-.
『지난해 파나마의 한 중계무역상으로부터 3백만달러어치의 TV·냉장고·전축 등을 수입했다. 대금 결제기간을 특별우대 받아 3개월로 정했는데 들여온 물건은 불과 한달만에 다 팔렸고, 물건을 팔고 받은 현지화는 몇 번 달러를 샀다 되파는 「환투기」를 했더니 대금결제기일에 물건값을 다 갚고도 5백만달러가 남았다.』
실제로 자기 돈 한푼 안들이고 「한탕」 에 5백만달러를 번 봉이 김선달식의 장사다.
한국의 부동산 투기열병에 비견되는 중남미 「망국병」의 하나인 환투기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극심한 인플레상황에서 정상적인 투자보다 환투기라는 재테크로 벌어들이는 「한탕주의」 이득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봉이김선달 무색>
실제로 하루가 다르게 돈 가치가 떨어지는 자국화폐를 아무리 싸들고 앉아있어 봐야 몇 달 후면 종이조각에 불과하지만 달러를 갖고 있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올라가 은행금리나 투자이윤보다 훨씬 높은 「이득」 이 보장된다는 생각이 일반국민과 기업인들 사이에 보편화돼 있다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달러를 움켜쥐려는 「달러사재기」가 계속되고 결국은 달러의 시중 공급량이 수요를 못따르게 돼 달러 값이 폭등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같은 달러 값의 폭등은 수출입의 파행현상을 초래, 대외무역거래질서를 완전 붕괴시키고 있다는게 현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기계류 같은 고가품의 자본재를 수입해야하는 중남미국가들은 달러가 고갈돼 대금결제를 못하는 상황이 발생, 국제적 신용도가 엉망진창이 되기 일쑤고 급기야는 급전의 신규차관을 다시 끌어들이기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남미외채의 상당부분은 이 같은 현실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기도하다.

<환솔만 일곱가지>
페루에서 각각 다른 7가지환율을 사용하고 있는 접이나 브라질에서 수출입업자들에게 적용하는 공식환율과 암시세와 비슷한 관광달러 (투리스모 달러) 라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환율, 일반거래환율 (압달러) 등의 3중 환율이 통용되고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닥을 알지 못할 만큼 폭락하는 자국화폐의 가치를 보전키 위해서는 결국 극약처방이라고 일컬어지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되고 이 경우 부동산이나 달러·귀금속 등과 같은 실물자산을 보유치 않는 중산층을 비롯, 하층계급이 받는 타격은 엄청날 수 밖에 없어 중남미 각 국의 중산층이 갈수록 엷어지는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달러투기로 얻은 소득이 사업투자 등 이른바 건설적인 생산투자에서 오는 이득보다 훨씬 높아 산업투자에 소홀하게되고 재투자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그나마 이룩해놓은 산업기반마저 붕괴되는 현상이 벌어져 오늘과 같은 위기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뿐만아니라 아르헨티나 등 일부국가들의 경우 기업들이 정부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환투기를 악용하고 있기도 하다.
정부의 정책이 기업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기업들이 담합, 달러를 풀어놓지 않고 곽 움켜쥐게 되면 달러 값은 일시에 폭등하게 되고 달러 값의 상승에 맞춰 물건값이 덩달아 뛰어올라 사회전체를 혼란과 혼돈으로 몰고 가는 수법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아르헨티나의 한 관리는 실토했다.

<대정부 압력 수단>
이렇게 되면 결국 이미 개인의 달러보유를 오래 전부터 관행화해 온 정부는 정권유지를 위해 힘들여 모아놓은 외환보유고를 털어 상당량의 달러를 시중에 풀어놓을 수밖에 없고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기업들에 굴복, 그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 관리의 설명이다.
일반국민·기업·근로자 할 것 없이 환투기에 열을 올리고 있고, 서슬이 시퍼렇던 군사정권마저도 달러를 무기로 하는 기업들에 굴복, 환투기를 근절시키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데 중남미국가들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글 이은윤 특집부장 문일현기자
사진 최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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