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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12. 오일 커넥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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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 중남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45번 고속도로를 타고 동남쪽으로 약 1시간 동안 달리면 멕시코만에 다다른다. 멕시코만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갤브스톤이란 긴 섬이 보이고, 그 안쪽에 자리잡은 갤브스톤만 주변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 석유 메이저들의 공장이 진을 치고 있다.

핼리버튼 갤브스톤 서비스센터도 그 공장들 중 하나다. 쇳물이 흘러내린 높다란 굴뚝들이 이 회사의 84년 역사를 말해준다. 세계 어느 곳이든 석유 냄새가 나는 곳에는 핼리버튼이 있다. 텍사스주에만 영업소가 1백곳이 넘는다. 핼리버튼은 굴착기술과 시추장비 등 유전개발 관련 종합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달 초 미 육군 공병단은 이라크전이 끝난 지난 5월 이후 핼리버튼이 이라크에서 따낸 수주 규모는 13억9천만달러라고 발표했다. 대부분 손상된 유전을 복구하는 공사다. 지난 8월 초 타미르 가드반 이라크 석유장관 직무대행은 이라크 석유산업을 재건하는 데 16억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핼리버튼이 이라크 유전 복구사업을 사실상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핼리버튼과 백악관의 유착관계는 이미 뉴스가 아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짝을 이뤄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 딕 체니 부통령은 핼리버튼의 최고경영자(CEO)였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그가 받은 보수는 총 4천5백만달러(약 5백20억원)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5월 초 헨리 왁스먼(민주당) 미 하원의원은 "핼리버튼이 미 정부의 금수(禁輸)조치에도 불구하고 80년대부터 이란.이라크.리비아 등과 거래해왔다"며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부시 대통령 자신이 석유업계 출신이다. 미 석유산업의 메카인 텍사스주 주지사가 되기 전인 80년대 중반 부시는 '스펙트럼 7'이라는 작은 석유회사를 직접 경영했다. "석유 비즈니스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부시는 나중에 이 회사를 2백만달러에 하켄에너지에 넘겼고, 자신은 하켄의 이사로 근무했다. 89년 하켄의 주가가 마구 뛰어오르자 부시는 그 해 6월 보유주식의 3분의 2를 처분해 85만달러를 챙겼다. 얼마 후 회계부정과 함께 대규모 적자가 공개되면서 하켄의 주가는 폭락했다.

부시 행정부와 석유업계의 긴밀한 커넥션을 보여주는 사례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라크전쟁 당시 미군은 임시기지를 이라크에 건설하면서 엑손모빌 등 특정 석유회사 이름을 붙였다. 카자흐스탄 유전 개발권을 따내는 과정에서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는 셰브론텍사코는 이 회사 고문으로 일해온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이름을 유조선에 붙여주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자 미국에서는 "'오일 커넥션'의 집권"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2000년 대선 당시 미 석유회사들은 부시.체니 진영에 2천6백70만달러의 후원금을 기부했다. 지난해 중간선거 때도 1천8백만달러를 제공했다. 초대형 회계부정 스캔들로 2000년 말 도산한 엔론사도 고액 기부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미 최대의 에너지 유통회사였던 엔론의 케네스 레이 전 회장은 부시가 주지사였을 때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다. 부시는 2000년에만 그를 두 번 만난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엔론은 3백50억달러의 빚을 지고 도산했다.

엔론의 국제사업부장을 지낸 아툴 다브다는 지난해 3월 '내셔널 인콰이어러'와의 인터뷰에서 "엔론은 9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에서 송유관 공사를 하기 위해 탈레반 정권과 은밀한 커넥션을 구축했다"고 털어놨다. 로비자금으로 탈레반 측에 수백만달러가 건네졌다는 것이다.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 일당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 정보당국이 이미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97년 아프간의 고위 관리들이 엔론사 초청으로 나흘간 텍사스주 슈가랜드를 방문한 사실이 미 국무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미 의회는 특정 기업의 이해가 정책에 반영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2월 미 의회 회계감사국은 백악관을 상대로 에너지정책 입안 과정에 엔론 등 석유기업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유례없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국가에너지 전략보고서' 작성팀이 어느 석유회사의 누구를 만났는지를 회계감사국이 조사하려 했으나 거부당하자 소송을 낸 것이다.

이 소송은 결국 법원이 권력분립을 해칠 수 있다며 기각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던 체니 부통령이 엑손모빌 등 석유회사 경영진을 여러 차례 만난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 보고서는 "에너지 안보를 미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면서 "걸프지역에서 미국의 석유 접근권을 확대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반전론자들은 이를 근거로 이라크전은 석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대규모 자본과 기술이 동원되는 유전개발 및 정유사업을 위해 미국 회사들은 최근 몇년간 거대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웠다. 98년 12월 미국 1, 2위인 엑손과 모빌이 합병해 유럽의 브리티시석유(BP)와 로열더치셸을 제치고 세계 정상으로 올라섰다. 2년 뒤엔 2, 3위의 셰브론과 텍사코가 합병대열에 동참했고, 지난해엔 코노코와 필립스가 손을 잡았다. 모두 '석유왕'존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오일에서 갈라져 나온 회사들이다.

1911년 독점법(셔먼법) 위반으로 30여개로 쪼개졌던 스탠더드오일의 후예들이 21세기의 '신제국'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으로 다시 뭉치고 있는 셈이다.

휴스턴(텍사스주)=특별취재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배명복 기획위원, 김민석 군사전문위원, 심상복 뉴욕특파원, 김종혁.이효준 워싱턴 특파원, 김진.최원기 국제부 차장, 신인섭 사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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