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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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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의 북한전문가 로버트 칼린의 글 한 편이 한국 언론을 일대 혼란에 빠뜨렸다. 그가 노틸러스연구소 홈페이지(www.nautilus.org)에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발언이라며 올린 '북 핵무기 5~6개 보유'발언 등이 '가상 에세이'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를 사실(fact)로 굳게 믿고 어떤 신문은 25일자 1면 머리기사에다 2~3개 면까지 할애해 집중 보도했다. 또 다른 신문들도 1면 또는 다른 면에 비중 있게 기사를 실었다.

본지도 실수가 있었다. 25일 일부 지역에 배달된 지면에 칼린의 글을 4면 박스 기사로 실었다. 다른 신문과 확실히 차이 나는 점도 있었다. 우리 정부 당국자를 취재해 "북한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그런 논의내용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추가 확인했다. 다른 신문들과 달리 조심스럽게 다룬 것이다.

칼린은 과거 미 중앙정보국(CIA)을 거쳐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담당관으로 일하면서 북.미관계를 다뤄왔던 인물이다. 그는 14일 미국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북.미 문제를 강석주 부상의 입장에서 가상해 써본 글"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번 오보 사태의 발단은 그 뒤에 빚어졌다. 노틸러스연구소 동아시아 사이트에 칼린의 글이 21일 '강석주의 연설 내용'으로 전재돼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노틸러스 측은 글 서문에 '강석주의 언급(speech)'임을 명시했다. 파문 이후에야 '가상적(hypothetical)이었다'고 정정했다. 칼린의 경력과 노틸러스연구소의 지명도 등을 감안할 때 한국 언론으로선 무시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조차 "북한 외교를 꿰뚫고 있는 전문가라는 점에서 칼린의 글이 100% 허구라고 볼 수만 없다"고 설명할 지경이다.

하지만 글 가운데 강석주 부상이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군부를 공개 비난했다는 내용 등 의심해 봤어야 할 대목도 적지 않았다. 선군(先軍)정치를 중시하는 북한에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촌각을 다투는 조간신문의 마감시간도 정확한 판단을 방해했다. 연합뉴스가 이 기사를 처음 타전했던 시간은 24일 밤 11시17분. 이후 25일 0시58분까지 13개의 관련 기사가 쏟아져 들어왔다. 사실확인.기사작성.편집을 하기까지 상황은 촉박했다. 본지는 결국 칼린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그 발언이 '금시초문'이라는 정부 당국자의 평가를 곁들여 보도했다. 그렇지만 다각적인 사실 확인 노력에 한계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오보가 됐다. 혼선을 겪은 독자 여러분께 사과 드린다.

이영종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