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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단과 따로노는 베스트셀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비평권밖에 있는 시·소설들이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을 독차지하고 있다.
최근 종로서적이 집계한 시 베스트셀러 10위까지의 목록을 보면 대부분 무명시인들의 시집들이다.
『만남에서 동반까지』(박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 더 마음절이는 것은 작은 웃음이다』(서영은엮음) 『보여줄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칼릴지브란·메리헤스켈) 『이런 사랑이고 싶습니다』(이경아) 『경춘수첩』(박열) 『차마, 소중한 사람아-한국 연시선집』(강은교외) 『편지』(김미선) 『영감의 시』(정명석) 『슬픈 시인』(신진규)『도적놈 셋이서』(천상범·중광·이외수)순이다.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내게는 길고 긴 사연이 시작됩니다./ 밤이 고즈넉히 벗할때면/ 나는 머나먼 그대의 환상을 좇아/ 밤의 여로속으로 여행을 떠나게됩니다./ 그 아무도 모르는 가슴 뭉클한 사연을 위하여/ …』 시집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는『만남에서 동반까지』의 한 부분이다.
박열씨는 1위인 이 시집외에 『청춘수첩』을 5위에 올려놓고 있어 시집 두권을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은 한국시사상 유례없는 「무명시인」이 됐다.
그러나 이 두권에 실린 시들에선 명상이나 철학은 물론 상징·이미지등 시적장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감상적인 언어들을 나열해 놓은데 불과해 비평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시집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온 시들은 2∼3권을 제외하곤 대부분 소녀적 취향의 고독·사랑을 꿰맞춘 국적불명의 연시들이다.
주 독자층은 여고생이나 직장여성들이다.
소설 베스트셀러 수위는 시인 신달자씨의 첫장편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가 차지했다. 신씨는 지난해 수필집 『백치애인』을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으며 고정독자를 확보해 놓고 있다. 2위는 박완서씨의 장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두편 모두 여류작가에 의한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 『전태일 문학상수상작품집-파업』(안재성) 『어머니』(막심고리키) 『하얀전쟁』 (안정효)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쿤데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이문열) 『나홀로되어 남으리』(김윤희)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양귀자)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겨울의 환』(김채원외)이 10위까지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창작·번역소설, 순수·민중소설이 고루 분포돼 있지만 소설분야 역시 여성취향이 강하다. 또 평단의 집중조명을 받고 있는 비교적 젊은층의 야심만만한 작품및 중량있는 작가들의 역작이 소외되고 있다.
이처럼 평단과는 철저히 따로 노는 문학독서풍토에대해 문단에서도 자성의 소리가 높다. 민중문학진영의 거친 목소리 위주의 작품, 실험이나 해체위주 작품들의 기존양식 파괴와 난해성등이 기성문단을 독자들로부터 외면시켰다는 지적이다.
또 작품과 작가에대한 깊은 관심없이 비평의 근본기능인 해석과 가치판단 가운데 해석을 소홀히 하고 이념을 내세우며 가치 재단을 한 평단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밖에 늘어난 출판사들의 「팔릴수 있는 책」만들기와 일부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매장 설치로 독자와 야합하려는 상업성도 문제가 되고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씨는 『70, 80년대 상업주의란 이름으로 매도돼온 일부 작가들의 행태가 그 이념적·몰이념적 지향과 상관없이 더욱 급속히 만연, 비평권 밖에서 그들의 자동적 시장기능을 넓혀 나갈것같다』며 『이념지향의 문학과 전위성·실험성을 띠는 문학은 적대의식을 버리고 상호협력해 문학의 상업성·통속성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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