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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아닌 피플파워" 시민들 환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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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가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에 간 틈을 타 19일 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장악했다. 20일 한 방콕 시민이 정부 청사 앞에 세워진 장갑차로 달려가 군인에게 장미꽃을 건네고 있다. [방콕 로이터=연합뉴스]

최형규 특파원 르포

20일 오후 5시30분(현지시간) 태국 방콕 라둠네른 거리. 철거된 서울 광화문 중앙청 건물을 빼닮은 태국 정부청사 앞으로 검푸른 탱크 5대가 일렬로 경계를 서고 있다. 탱크 위와 주위엔 베레모를 눌러쓴 태국 특수부대원들의 눈빛이 매섭다. 병사들은 쿠데타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는 분위기다.

그러나 탱크 주위를 보면 긴장감은 없고 축제 분위기다. 1000여 명의 방콕시민들이 탱크 앞에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여기저기서 군인들을 향해 브라보를 외치기도 한다. 사진을 찍고 있던 쇼나왓(27.컴퓨터 프로그래머)은 "이건 쿠데타가 아니라 민심을 군인들이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다. 탁신 정권이 부패했다는 사실은 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번 일을 쿠데타라 부르지 않고 태국판 '피플 파워'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200여m 떨어진 왓 벤차 거리. 정부청사로 들어가는 입구다. 여기에도 20여 명의 특수부대원들이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입구를 지키고 있다. 갑자기 노인 두 명이 리어카에 상자를 가득 싣고 와 군인들에게 건넨다. 상자를 여니 빵과 우유.물.비스켓.휴지.주스가 가득차 있었다.

방콕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티파팃 카윈파타이(60)는 "오늘 아침 탁신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좋아 사재(?)를 털어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가져왔다"며 군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종합청사 앞 병력을 제외하고 시내 방송국과 은행건물 등을 지키는 군인들에게서도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청사에서 300여m 떨어진 사남수아파 거리의 한 은행 분점 앞. 4명의 병사가 피곤한 듯 앉아 있다. 앉아서 근무하면 혼나지 않느냐는 기자 질문에 한 병사는 "쿠데타가 아니라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라며 웃는다. 20일 오후 방콕시내 어디를 가도 교통이 통제되는 곳은 없었다.

밤이 되면서 탁신 총리의 가족이 싱가포르로 몸을 피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은행원 파사라(24.여)는 "올 초 총리 가족이 소유기업의 주식을 처분해 엄청난 돈을 번 뒤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왜 외국으로 도망가는지 모르겠다"며 "총리가 번 돈을 모두 회수해야 한다"며 목성을 높였다.

일부에서는 탁신 총리를 추종하는 군병력에 대한 두려움도 감지됐다. 20일 저녁에는 몇 개 사단이 쿠데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소문도 돌았기 때문이다. 계엄사령부가 5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를 불허하자 긴장하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보디페인팅 가게를 운영하는 용 수파차이(29)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며 "쿠데타는 관광 산업 등 태국 경제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고 우려했다.

방콕 외곽에서는 전자제품 상가 앞에 모여 TV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시민들이 많았다. 6개 지상파를 포함한 모든 방송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계엄사 뉴스나 국왕의 사진 등 애국심을 고취하는 방송만 내보내고 있다. 쿠데타를 주도한 손티 분야랏글린 육군 총사령관을 비롯한 군부 대표 5명은 이날 오전 국영 TV에 나와 "질서가 잡히는 대로 권력을 국민에게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태국 군부는 이날 상.하원을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일시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현지의 한국대사관은 19일 밤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한인회, 지사.상사 협의회, 투자업체협의회 등을 통해 교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외출을 삼가고 안전에 유의해줄 것을 당부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아직까지 쿠데타 과정에서 충돌이나 저항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태가 어떻게 나갈지 몰라 안전에 유의해 줄 것을 교포 사회에 당부했다"고 말했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함영하(47)씨는 "태국은 연간 80만 명의 한국 관광객이 오는데 이른 시일 내 정국이 수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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