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가 본 노 대통령 - 부시 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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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부시 정상회담은 실패하지 않는 데 성공했다. 오늘의 한.미 관계는 언제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과 같다. 뉴욕 타임스는 한.미 간 인식의 차이가 동해만큼 넓다고 표현했다. 한.미 간의 가장 큰 견해차는 물론 북한 문제다. 미국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때까지, 또는 뉴욕 타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북한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가능한 모든 금융제재를 동원할 태세다.

한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북한을 6자회담에 끌어내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한다. 북한이 지난 7월 발사한 미사일도 노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수단이고, 부시 대통령에게는 군사적인 무기다.

두 정상이 회담을 마치고 기자들에게 한 발언을 보면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못한다는 데 합의(Agree to disagree)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한.미 간 합의사항의 하나로 알려진 포괄적인 접근 방안의 내용에 관해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공동방안을 협의 중이지만 완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용이 매우 복잡하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6자회담장으로 유인할 인센티브(반대급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북한 인민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 북한 지역이 안정되는 것, 북한 사람들의 식탁에 음식이 오르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한국의 요구대로 금융제재 완화 같은 회유책을 쓸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한국이 주장하는 포괄적인 접근 방안에 미국이 동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이 텅 빈 미봉책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전에 노 대통령은 헨리 폴슨 재무장관을 만나 (북한의 위폐에 관한) 미국의 법 집행과 6자회담을 통한 핵 문제 해결의 노력이 조화를 이루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북한이 체면을 잃지 않고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게 금융제재를 완화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폴슨 장관은 불법행위에 대한 법 집행은 타협의 대상이 안 된다는 말로 노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부시 앞에서 북한 제재에 관해 "새삼스럽게 또 다른 제재를 얘기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는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주장이다. 결국 이번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 재개의 묘수는 발견되지 않았다. 북핵 해결의 전망은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남는다. 부시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을 재확인한 것은 의미 있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확인해 왔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문제로 많은 한국인이 불안해하는 시점에 부시는 한국 국민에게 미국 정부가 한반도 안보에 여전히 책임을 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과 한반도 유사시(有事時) 필요한 만큼의 미군을 증파하겠다는 의미다. 노 대통령은 부시의 이런 방위공약 확인으로 국내의 반대 여론 설득에 힘을 얻게 됐다. 노무현.부시의 합의로 전작권 인수는 기정사실이 되어 반세기 만에 한.미 동맹은 새로운 비전과 가치를 토대로 구조와 시스템이 바뀌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부시 대통령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새로운 한.미 동맹의 시야와 주한미군의 행동반경이 한반도 밖으로 외연을 넓힌다는 의미로 들린다. 중국의 팽창주의와 일본의 재무장을 생각하면 우리 쪽에서 먼저 해야 할 말이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과거와 같이 미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삼간 것은 다행이다. 그는 전작권 '환수'라는 표현 대신 '전환'이란 표현을 쓰는 예의도 갖췄다. 부시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9.11에 대한 위로의 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지지 표명, 미국의 지원에 힘 입어 한국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여기까지 왔다는 덕담도 좋았다. 그게 외교다. 노 대통령이 2003년같이 귀국 후에 말을 바꾸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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