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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in] 핏빛 사랑, 질펀한 난장, 현란한 춤의 '문화 향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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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연극.무용.거리극 등 순수 공연 예술을 포괄하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10월 7~29일)가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9회째를 맞이한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10월 10~25일)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고상한 공연제는 사치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늘 끼고 앉은 TV와 바람쐬듯 둘러보는 영화만으로 자신의 문화 생활을 제한한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잠시 순수 예술에 몸을 담그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수 있을 터. 놓치면 아까울, 두 공연제 대표작을 세 편씩 추려봤다.

최민우 기자

정화된 자들 극단의 사랑, 그 잔혹한 탐구

27세에 자살한 영국의 천재 작가 사라 케인의 작품이다. 동성애.근친상간.성 전환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남매가 있다. 여동생은 '금지된 사랑'을 꿈꾸며 친오빠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오빠는 동성애자다. 그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아파하며 마약에 몸을 맡긴다. 결국 주사기를 눈에 쏘고는 자살한다. 오빠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여동생 역시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오빠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남성으로 성 전환을 감행한다. 그녀에겐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그녀가 남성으로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표시해, 둘은 가까워진다. 다른 한명은 팅커 박사다. 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되고 고립감을 느낀 그는 폭력을 행사하고, 마약에 빠지도록 둘을 부추긴다. 그러나 사악함에 휩싸이던 팅커 박사 역시 또 다른 여인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런 줄거리만으론 그리 색다르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 사라 케인은 사랑으로 가는 과정을 지독하리만큼 처절하게 그려낸다. 그녀에게 달콤하고 향긋하며 로맨틱한 사랑은 거짓일 뿐이다. 마치 영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뿌연 필름처럼 무대엔 잔혹함이 넘쳐난다. 시뻘건 피가 난무하는가 하면, 인간 신체의 극단을 묘사하기도 한다. 보는 관객들로선 불편할 수밖에 없다.

사라 케인은 "혼란이 위험하지만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선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의 보라빛 낭만도, 파괴적인 말살도 모두 부정한 채 비록 험난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암흑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정화'된 무언가를 만날 수 있음을 그녀는 얘기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매듭 이·팔 갈등의 최전선

올 공연예술제 최고 문제작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다룬다. 출연 배우의 출신지가 섞여 있다. 이스라엘 5명,팔레스타인 4명이다. 연출가는 유대계 이스라엘인 2세 야엘 로넨.

무대엔 회색 분리 장벽이 세워진다. 자살 폭탄 테러로 남편을 잃은 이스라엘 여성, 군인의 총에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성, 마치 놀이를 하듯 순교자가 되겠다는 팔레스타인 아이, 애인과 시시껄렁한 통화를 하며 학대를 자행하는 이스라엘 군인이 나온다. 자신들의 예민한 문제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공연을 보면서 이런 생뚱맞은 상상도 하지 않을까 싶다.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과 남한의 빈부격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을 남과 북의 배우가 합쳐 만들 수 있을까. 행여 만든다면 과연 어디서 공연이 가능할까.



떠들썩한 잔치 유랑극단의 신나는 난장판

2004년 스페인무용제 대상작으로 벨기에 무용 작품이다. 말 그대로 신나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유랑 극단의 삶을 통해 무대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을 무대 뒤편으로 끌어들인다. 기존의 무용을 비꼬기라도 하듯 곡예에 가까운 춤을 보여준다. 중력을 넘어서려는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춤이 시작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피에르 바스티엥이란 연주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1인 오케스트라 연주 장치인 '메카니움'을 활용해 라이브로 음악을 들려준다. 초연 당시 "진정한 파티, 유머로 가득 찬 여행, 무한한 포용력을 지닌 기쁨과 놀이에 관한 이야기"란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벨기에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정서를 느낄 수 있음이 새롭고 반갑다.


비보이부터 서커스까지 … 상상할 수 있는 춤의 끝

케피그 무용단 '버려진 땅'

열풍처럼 번지고 있는 비보이 열풍. 이 작품은 한국의 비보이 공연 제작자들이 빠짐없이 봐야할 듯 싶다. 빼어난 테크닉만으로 훌륭한 공연을 만드는 것은 아님을 확실히 보여준다. 빈틈 없는 구성력, 테크닉 간의 기민한 연결고리, 상징적인 무대, 애잔한 음악 등이 전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안무가는 무라드 메르주키. 그는 알제리 출신 이민자로 리옹에서 자랐다. 이 작품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전면에 깔려 있다. 그의 유년기는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척박하며 외로울 따름이다. 그는 뒷골목을 전전했다. 거기엔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이 있다. 그들은 힙합을 추며 자신들의 동지애를 나타낸다. 도시에서 건너온 소녀로 시끌벅적한 일도 벌어진다. 다양한 에피소드엔 우울함을 극복하는 유머와 희망이 스며 있다.

작품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모든 춤이 다 등장한다. 머리를 바닥에 댄 채 빙그르르 도는 '헤드 스핀'을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다리에 올라가 고난도 공중 곡예 기술로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든다. 비보이와 아크로바틱, 현대무용과 서커스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21세기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무용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음악 또한 아라비아 계통과 스페인 플라멩코가 뒤섞인 채 국적 불명의 묘한 여운을 남긴다.

비주류에 머물던 힙합을 현대 무용과 절묘히 결합한 창조성을 인정 받아 프랑스 문화부 '예술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무용 전용 극장 리옹 '메종 드 라 당스'의 전폭적인 지지도 받고 있다. '버려진 땅'이란 제목과는 전혀 달리 케피그 무용단은 이제 '비옥한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테로 사리넨 무용단 최고 인기 안무가의 컴백

지난해 서울세계무용축제 최고 인기 안무가 테로 사리넨의 재공연. 이번엔 '미지로' '떨림' '페트루슈카'란 세작품을 들고 왔다. 핀란드 국립발레단 출신인 사리넨이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이유는 전세계 무용에서 필요한 자양분을 적절히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클래식 발레, 일본 부토, 유럽의 현대 무용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기에 기괴한 동작과 감성 어린 철학 등 그만의 색깔을 덧칠했다. 서사가 없이 내적 갈등만을 다룬 3인무 '페트루슈카'에선 2명의 아코디언 연주자가 오케스트라에 못지 않은 풍성한 음악을 선사해준다니 귀를 쫑긋 세울 것.



이마누엘 갓 무용단 관능미 넘치는 살사의 진수

세계적인 현대 무용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 이마누엘 갓은 오하드 나하린을 이을 차세대 이스라엘 안무가로 꼽힌다. '봄의 제전' '겨울나그네' 두 작품을 선보인다. 그는 '사교춤'에 예술적 감수성을 불어 넣곤 한다. '봄의 제전'에선 무대 한가운데 깔린 폭 좁은 붉은 색 카펫 위에 검은 색 의상을 입은 남자 두 명, 여자 세 명이 등장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살사 동작을 이어간다. 클라리넷을 전공한 음악도 출신답게 빼어난 리듬감에 관능미를 살려낸다는 평가다. '겨울 나그네'에선 빡빡 깍은 머리의 건장한 무용수들이 여성 관객의 눈길을 끌어모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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