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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식 아동”이라 불리는게 싫다(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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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점심 굶는 어린이 만3천여명/열등감 안생기게 학교급식 등 근본대책 필요
새학기를 맞은 서울 신도림동 S국교 5학년 김모군(11)은 이제 막 2교시가 시작됐지만 벌써 배가 고파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할머니(70)ㆍ동생(9)과 같이 살고 있는 김군은 며칠전부터 할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점심은 커녕 아침조차 굶고 등교한다.
김군의 아버지는 4년전 공장에서 작업도중 감전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두손을 절단,노동력을 잃고 거리로나가 구걸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오다 지난해 11월 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했으나 치료비가 없어 퇴원한 뒤 집에서 약도 쓰지 못한채 투병하다 지난달 숨졌다. 김군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고로 두손을 잘린직후 가출,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지만 다른아이들과 같이 먹으면 창피해요.』 서울 N국교 송모군(12)도 이른바 「결식아동」.
송군의 가정환경도 어머니는 가난에 못이겨 이미 오래전에 가출했고 할머니(73)는 노환으로,아버지(47)는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병석에 눕자 중학교를 다니던 형(14)이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업,생계를 꾸려나가는 등 불우하다.
그러나 송군은 자신이 결식아동으로 낙인(?)찍히는게 싫다.
담임 이모교사(27ㆍ여)는 『송군이 아침도 굶고 점심도 싸오지 못해 하는 수 없이 학교에서 주는 도시락을 받아먹긴 하지만 도시락을 다 먹을때까지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학교 결식아동 박모양(11)도 『양호실에서 선생님과 같이 먹으면 괜찮은데 교실에서 먹으면 아이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같아 싫다』고 말한다. 동생(9ㆍ남)은 아직 철이 없어 배가 고프면 선생님에게 밥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지만 박양은 벌써 가난이 부끄럽다.
박양의 부모는 두 남매를 할머니(68)에게 맡기고 집을 나가 생계가 막연한 상태. 동네교회나 이웃에서 쌀ㆍ반찬 등을 조금씩 갖다줘 겨우 살아가고 있지만 박양 남매는 굶는 날이 더 많다.
국민소득이 5천달러. 어린이헌장에서 조차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는 조항이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라며 빼버린 지금 아직도 「굶기를 밥먹듯」하는 어린이들이 배고픔의 고통속에 풀이 죽어 있다.
현재 결식아동은 서울에서만 2천1백6명,전국적으로는 9천5백명이나 된다. 여기에다 오전수업만 하는 1,2학년을 포함하면 전국에 결식아동은 1만3천여명에 이를 것으로 문교부 관계자는 추산하고 있다. 이는 89년 8천여명에 비해 50% 이상 늘어나는 셈이다.
결식아동 문제는 지난 88년 국정감사때 문교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돼 당시 사회전반에 충격과 함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정부는 예산을 긴급 배정,급식비조로 결식아동 1인당 6백원씩 지원하다 지난해 8월부터 2백원 올려 지금은 8백원씩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일선교사들은 『학년이 높을 수록 자신이 결식아동이란 사실을 애써 숨기거나 도시락 받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고 『급식비 지원같은 일시적 도움보다는 학교급식실시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신학기에 서울 K국교로 부임,6학년 담임을 맡은 오모 교사(33ㆍ여)는 최근 자기반 결식아동 파악을 위해 도시락 검사를 했다. 4명의 아동이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 가정환경을 조사해 급식비지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그중 한아동이 강력히 반발하며 자신은 도시락을 싸올 수 있다고 고집했다.
다음날 오교사는 비닐봉지에다 밥과 시래기를 넣어 도시락이라고 싸온 그 어린이를 보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오교사는 이런 아동을 대할때 『끼니를 거르는 배고픔도 안쓰럽기 짝이 없지만 그들의 마음에 드리워지는 그늘이 더 가슴아프다』며 『빈부차에서 오는 열등감ㆍ반발심ㆍ패배의식으로 동심이 멍들지나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학교급식은 결식아동 뿐만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에게 균형있는 영양을 제공하고 배식 등을 통해 공동체의식을 심어줄 수 있으며 이밖에도 편식교정 등 올바른 식생활습관을 길러주는 등 많은 장점이 있다고 교육관계자들은 지적한다.
정부도 학교급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81년 학교급식법을 제정,일부학교에서 학교급식을 실시하고 있긴하나 현재 혜택을 보고있는 국민학생은 29만7천명으로 전체 학생수의 6%에 불과하고 학교수는 7백65개교로 전체의 10% 수준. 90∼1백% 까지 실시하고 있는 선진국에 비하면 말조차 꺼내기 부끄러운 정도다.
급식비는 도시의 경우 인건비ㆍ연료비 등 운영비는 정부에서 보조하지만 식품비는 전액 학부모로부터 받는다. 농어촌은 식품비의 3분의1,도서벽지는 전액을 지원받고 있다. 이때문에 급식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많은 학교는 꿈도 못꾼다. 정작 학교급식이 필요한 결식아동이 많은 학교들이 전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2백12명의 결식아동이 있는 서울 N국교 한모 교장(61)은 『유료급식인원이 1천명 이상은 돼야 학교급식운영이 가능한데 우리학교는 어렵게 사는 가정이 많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고도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결식아동. 그들은 반찬투정에 흰쌀밥 도시락도 마다하고 부모들이 고급승용차로 학교까지 태워주는 같은 또래 어린이를 볼때 무슨 생각을 할까.<정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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