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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맞아 떨어진 한­소 저울/양국 관계개선 급진전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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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경제 재건 노려 파격적 대우 소/북한개방 위해 발걸음 재촉 한
한소간의 관계개선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급진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미수교국인 한국의 정당대표 김영삼 민자당최고위원을 직접 만난 것도 이례적인 일이거니와 소련지도부가 그를 상대로 수교 일보직전의 관계인 총영사관 설치에 합의한 것은 외교관례상 파격에 속한다.
소련은 작년 11월 우리와 사실상의 영사관계인 영사처 교환을 합의할 때만 해도 ▲단독영사관을 설치하지 않고 ▲국기를 게양하지 않으며 ▲외교관 번호판을 승용차에 달지 못하는 기형적 조건을 고집했었다.
물론 이것은 소련이 북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관계를 겉으로 공식화하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준국가간 교류기능을 확보해 경제협력부터 활성화시키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런 소련이 불과 몇개월만에 총영사관 설치에 동의한 것은 이미 공식수교를 전제로 한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속도로 나가면 한소수교는 시간문제이며 빠르면 연내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양국관계가 급진전한 것은 우리의 노력도 주효했겠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대한태도와 대외 정책기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데 힘입은 바 크다.
외무부 관계자들은 『지난해 11월까지 동서독이 이토록 빨리 통일에 접근하리라고 예상 못했던 것처럼 소련의 개방화와 신사고의 전개도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급진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 관계자는 『소련은 북한에 대해 중국과는 다른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 있어 북한의 반발이나 눈치를 크게 보지 않아도 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소련의 군사적 이해관계도 이제 육상보다는 해군쪽에 기우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해군까지도 캄란만 철수를 계기로 미소간 경쟁무드가 줄어드는 상황이어서 북한과의 긴절한 협조분야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 대해 군사무기ㆍ과학기술지원 등에서 견제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어 북한의 이탈을 중국만큼 민감하게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특수성이 있다.
외교안보연구원의 소련문제담당자인 김부기교수는 한소관계의 급진전은 무엇보다 소련사회 자체가 다당제ㆍ대통령제ㆍ시장경제체제 도입 등으로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교수는 또 『국제정치적으로는 지난해 7월 몰타에서 열린 미소정상회담의 결과 동서화해가 정착됐고 미국이 고르바초프체제를 신임하고 대소 협력정책으로 전환한 것이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제 소련은 북한과의 기존관계와 함께 한국과도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유효한 수단이라고 믿는 것 같다.
고르바초프는 이미 지난 88년 9월 그라스노야르스크연설에서 동북아 해역에서의 다자간 군축회의를 제안한 바 있으며 소련은 같은 해 10월 노태우대통령이 유엔연설에서 제안한 동북아 6개국 협의체 구성에 내막적으로 동조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소련이 당장 한국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것은 경제협력문제다.
외무부 관계자들은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등 경제협력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으며 소련의 실력자 야코블레프등이 최근 한국이 생각보다 대소 경제협력에 소극적이라고 불평한 것 등이 그 근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에겐 개방의 궁극적 목표인 경제재건을 앞당길 시베리아 개발등에 한국의 투자ㆍ참여가 절실하다는 의미다.
특히 소련은 한국의 시베리아 개발 참여가 북방 4개 도서문제로 경제협력에 소극적인 일본을 자극,일소 경제협력을 앞당기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아무튼 북한의 개방유도를 위해서는 대소수교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한국으로서는 정부 각부처간에 대소경제협력위원회를 설치,수교무드를 활성화하고 북방교류위원회를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경제협력 증대를 위해선 이미 소련과 맺고 있는 항공협정ㆍ과학기술협력협정외에도 투자보장협정ㆍ이중과세방지협정 등을 체결하기 위한 실무적 협상도 시작할 방침이다.
또한 최호중외무장관이 이미 제안해 놓은 한소 외무장관회담을 적극 추진중인데 오는 4월24일부터 열리는 유엔경제특별총회에 참석하는 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조현욱기자>
◎김영삼위원 모스크바 이모저모/박정무 “총영사관 금시초문”/YS와 선수다툼 불협화음
○…김최위원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21일 저녁(현지시간) 전격회담은 정재문의원이 지난 2월 선발대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추진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원은 당시 브루텐스 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부부부장을 통해 이같은 의사를 전달했고 작년 김최고위원 방소때 호스트였던 프리마코프 연방회의의장이 비공식 일정으로 회담을 추진해왔다는 것이 김최고위원측의 설명.
이 때문에 김최고위원측은 21일 당일까지도 정확한 회담일정을 감잡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날중 아니면 모스크바 출발 하루전인 26일께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김최고위원이 야코블레프와 만나게 된 것도 브루텐스부부장의 중재로 가능한 것이었다는 후문.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는 정부의 「북방정책팀」은 김최고위원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회동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데다 회동사실이 공개된 점을 놓고 신중한 반응.
박철언정무장관과 정부실무관계자 3∼4명으로 이뤄진 북방정책팀은 회담이 있은 것으로 알려진 21일 밤 밤을 새워가며 소련측의 의도와 회담사실의 공개가 가져올 파장을 분석했다고 한 관계자가 설명.
이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막후협상에서 소련측의 태도에 실질적인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김최고위원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이 이루어진 점은 대단히 부담스럽다』면서 『특히 회담사실이 즉각 국내언론에 보도돼 협상자체에 상당한 장애가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
김최고위원의 모스크바 도착보다 며칠 먼저 이곳에 도착한 정부실무자들은 박장관과 합류한 뒤 소련측과 몇차례 회동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박장관은 이 같은 사실의 확인을 거부.
○…소련을 방문중인 김영삼 민자당최고위원측과 박철언정무장관간에 한소수교 일정및 회담발표문제 등을 놓고 은근한 갈등을 빚고 있어 주목.
김최고위원은 22일 오전(현지시간) 모스크바시청을 방문하기 앞서 기자들과 만나 『어제 브루텐스 소련공산당 국제부부부장을 만나 현재의 영사처를 총영사관으로 승격시키도록 합의했다』고 말하고 『지금 박장관이 브루텐스를 다른 곳에서 만나 이 문제를 사무적으로 마무리짓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으나 브루텐스를 만나고 돌아온 박장관은 『브루텐스와 총영사관 승격문제를 논의한 바 없다』고 말한 뒤 총영사관 설치 합의란 말도 안된다고 일축.
김최고위원과 박장관은 숙소로 돌아와 이 문제를 놓고 30분간 숙의했으나 여전히 이견을 보였는데 박장관은 『김최고위원에게 확인을 요청하니까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더라』며 어이없어하는 표정.
공로명 주소영사처장도 『대사가 국가원수의 대표인 데 비해 총영사는 정부대표이므로 완전한 외교관계수립이라고 볼 수 없지만 넓은 의미의 공식관계를 의미한다』고 언급.
이같은 사태에 대해 관계자들은 정부측이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곧바로 대사급 수교를 추진하고 있는 터에 김최고위원이 소련측의 총영사관 제의를 정부측과 협의없이 동의해 준 데 따른 불협화같다고 분석.<모스크바=이규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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