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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동물 세밀화에 붙인 재치 만점 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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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퍼리 로직: 당신을 보여주세요

제인 시브룩 지음, 이진우 옮김

여러누리, 80쪽, 9000원

이번엔 그림책입니다. 극사실적인 동물 세밀화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고요, 어른들이 읽어도 얻는 것이 적지 않을 책입니다.

지은이는 뉴질랜드의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그림쟁이란 뜻이지요. 아주 가는 담비털 붓으로 야생동물의 터럭 하나하나 공들여 그린 수채화가 우선 눈길을 끕니다. 어찌나 사실적인지 손으로 가만히 그림을 문지르면 털가죽을 쓰다듬는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특히 동물의 눈동자에 신경을 썼다는데 정말 감정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한 표정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림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 말로는 '복슬복슬 논리'라 할 수 있는 제목에서 짐작이 가듯 동물 그림에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글이 일품입니다. 그림에 곁들여 붙인 짤막하지만 재치 넘치는 농담을 '원 라이너(one-liner)'라 한다는데요. 이거 장난 아닙니다. 고승(高僧)의 선문답처럼 곱씹어볼 거리가 수두룩합니다.

이를 테면 이런 겁니다. 노란 눈썹에 빨간 부리가 잘 어울리는 마카로니 펭귄 한 마리 그림이 두 페이지를 메우면서 "당신이 특별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아끼고 존중하라는 메시지인가 되새기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수많은 마카로니 펭귄 그림과 함께 "남들과 똑같이"란 글이 나옵니다. '아, 다른 이들도 나처럼 특별하니 서로 존중하라는 뜻이군'하면서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노란 깃털이 탐스러운 작은 위버새는 또 어떻고요. 이 새의 수컷은 짝을 맞이하려면 둥지를 지어야 하는데 짓는 동안 둥지가 갈색으로 변해버리면 짝을 구할 수 없답니다. 암컷 위버새는 신선한 초록색 둥지에만 눈길을 주기 때문이지요. 둥지를 만드느라 아등바등하는 위버새 그림에는 "일의 문제점은…매일 해도 끝이 없다는 거야"란 한탄이 실렸습니다. 비록 수컷 위버새 이야기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표시도 나지 않는 집안일에 시달리는 주부들을 위한 위로로 읽힙니다.

애인에게 차이는 다람쥐 그림도 마음에 쏙 듭니다. 깜찍한 표정의 다람쥐가 양발로 국화를 움켜쥐고 있는 그림입니다. 곁들인 글은 "나를 떠나겠다고…" "나도 떠나도 되지?"입니다. 이 가을 이별을 겪는 이들을 위한 발칙한 위로로 이만한 게 있을까요? 노란 국화는 아마 다른 짝에게 바칠 거 아닐까요?

사노라면 마냥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안타깝거나 답답한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촌철살인식으로 숨통을 틔워주는 한마디는 정말 고마울 겁니다. 성자(聖者)나 현자의 가르침도 좋지만 이건 좀 다릅니다. 익살스러운 몸짓과 표정이 동물들이 능청스레 던지는 한마디이니 부담감이나 거부감 없이 슬며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책입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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