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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엔드에서의 꿈같은 일주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메카다. 본지 공연 담당 기자인 최민우 기자가 8월말 1주일간 웨스트엔드를 둘러 보고 왔다. '뮤지컬 빅뱅'이라는 말처럼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뮤지컬. 과연 뮤지컬 본향에서의 흐름은 어떨까. 웨스트엔드 뮤지컬에 대해 총 10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20년, 멈추지 않는 신화-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내가 오페라의 유령을 처음 본 건 10년전쯤 일이다. 혼자서 유럽 배낭을 왔던 1997년 11월, 브라운색 정장을 빼 입고, 나름대로 온갖 폼을 잡으며 간 극장이 'Her Majesty Theater'였다. 무려 45파운드를 내고 좌석도 가장 고급이라는 2층 드레스 서클에서 봤다. 그땐 '뭐가 좋다고 이리 난리지'라며 내내 하품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오페라의 유령은 같은 극장에서 하고 있다. 단지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땐 45파운드로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 돈으로 3층 구석진 자리에서나 볼 수 있다는 것 정도. 어디 10년 뿐이랴. 오는 10월9일이 되면 오페라의 유령은 탄생 20주년이 된다. 한 작품이, 그것도 같은 극장에서 변함 없이 20년간 공연된다는 사실. 어쩐지 놀랍고 또한 낯설고 한편으론 섬뜻하지 않은가. 그게 콧대 높은 영국 문화의 힘일까. 오페라의 유령은 모든 뮤지컬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제껏 20개국 110여개 도시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지금도 런던 공연은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좋은 좌석을 앉기 힘들만큼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중이다.

무엇이 이토록 이 작품을 롱런하게 만들었을까. 1막 마지막에 쿵 떨어지는 샹들리에 장면은 빠르게 진화하는 21세기 무대 매커니즘을 고려하면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사랑과 질투, 연민과 폭력이란 유령의 복합적 심리 묘사 역시 빼어나긴 해도 이젠 식상하리만큼 너무 알려져 있다. 유령의 성에 은은하게 켜져 있는 촛불 역시 신기하긴 하나 그것만으로 20년을 버티기란 역부족이다.

10년 만에 다시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내가 다시금 느낀 건 뮤지컬 넘버의 힘이었다. 모든 게 익숙하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더라도 동명 타이틀곡 'The Phantom of the Opera'는 물론, 특히 'All I ask of You'는 계속 입안에서 맴돌았다. 기록을 보니 오페라의 유령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뮤지컬 음반이 판매 1위에 올랐으며, 전세계적으로도 25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단다. 연극과 다르고, 영화보다도 훨씬 생명력 있는 뮤지컬 음악. 그 덕분에 짧은 시간에 파괴적으로 시장을 석권하는 영화와 달리 뮤지컬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몇십년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100년이 시간이 지난뒤 위대한 클래식 음악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더 위로해줄 이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 줄거리

제1막

1905년,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경매가 열린다. 음침한 분위기. 각자 사연이 있음직한 물건들이 하나 둘씩 새 주인에게 팔려나간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70세의 노인, 라울이 휠체어에 기대어 앉아 있다. 이윽고, 원숭이가 장식된 음악상자가 나오자 그는 거액을 들여 낙찰을 받는다.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멜로디에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녀가 말했던 정말 그대로의 모양이구나. 이제 우리 모두 죽어가는데 그래도 너는 계속 노래하겠지…." 이윽고 수십 년 전 정체 모를 괴인, 오페라의 유령이 망가뜨렸다는 대형 샹들리에가 새롭게 복원된 전기장치로 불을 밝히면, 무대는 어느새 과거로 돌아간다.

경매가 있기 수십 년 전의 오페라 하우스, 새로운 오페라 '한니발(Hannibal)'의 리허설이 한창이다. 무대 한 편에서 오페라 하우스의 매니저인 르페브르가 등장하고, 그는 단원들에게 새로운 경영자인 앙드레와 피르맹을 소개한다. 그러나 웬일인지 르페브르의 표정에서 자신의 은퇴에 대한 아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새로운 매니저들의 요청에 프리마돈나인 칼롯타는 '나를 생각하세요(Think of me)'를 부른다. 그러나 1절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오페라의 유령이 한 짓이라고 수근대고, 화가 난 칼롯타는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무대에 설 수 없다고 선언하며 극장을 떠난다.

설상가상으로 발레감독인 지리 여사는 어디에선가 자신의 월 급여와 특정 박스 좌석을 비워둘 것을 요구하는 유령의 메시지를 가져와 매니저들에게 전달한다. 그때서야 앙드레와 피르맹은 유령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한편 지리 여사의 딸인 맥은 새 경영진에게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무용수인 크리스틴이 칼롯타를 대신해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한다. 급박한 공연 날짜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신참 매니저들은 그녀에게 오디션의 기회를 주고, 크리스틴은 멋지게 이 역할을 소화한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객석에는 오페라 하우스의 새로운 재정 후원자인 귀족청년 라울이 앉아 있었다. 그는 한 눈에 크리스틴이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였음을 알아본다. 공연을 마친 후, 맥은 크리스틴의 성공을 축하하며 혹시 새로운 음악 선생님이 생겼는가를 묻는다. 그러자 크리스틴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음악의 천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며, 마치 그에게서 음악 수업을 받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축하객들이 돌아가고 대기실에 혼자 남은 크리스틴은 갑자기 거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정말 아버지의 유언대로 거울 속에서 음악의 천사라 자칭하는 사나이,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반쪽 얼굴을 하얀 가면에 가린 채 연미복 차림의 유령은 마치 마법이라도 걸듯이 크리스틴을 이끌고 미로같이 얽힌 파리의 지하 하수구로 사라진다. 검은 돛단배의 선수(船首)에 앉아 크리스틴은 묘한 두려움과 매력에 사로잡힌다. 낮과 밤의 구분조차 모호한 지하세계의 어둠 속에서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자신의 음악을 가르치겠노라고 노래한다.

이튿날 아침, 크리스틴은 유령의 오르간 소리에 잠에서 깬다. 그리고 호기심에 유령에게 몰래 다가가 가면을 벗긴다. 흉한 몰골에 놀라는 크리스틴. 유령은 분노와 슬픔에 떨며 자신에 대한 두려운 감정은 사랑으로도 바뀔 수 있다며 흐느끼고 크리스틴은 그런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크리스틴의 실종으로 오페라 하우스는 혼란에 빠진다. 이윽고 크리스틴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새로 공연될 오페라 '일 무토(IL Muto)'에서 칼롯타 대신 크리스틴을 주인공으로 기용하라는 유령의 메모가 전달된다. 그러나 극장 매니저인 앙드레와 피르맹은 유령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유령의 급여는 커녕 그가 요구한 박스석도 비워두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일 무토'의 무대는 강행되었지만 무대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칼롯타는 유령의 저주를 받아 개구리 울음소리만을 내게 되고, 유령의 존재를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던 무대 담당자 죠셉 부케는 공연 도중 목이 매달린 시체로 발견된다. 이어지는 혼란 속에 크리스틴은 라울과 함께 오페라 하우스의 지붕으로 잠시 피신한다.

크리스틴은 라울에게 유령과의 괴이한 경험을 털어놓지만, 라울은 유령이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 뿐이라며 그녀를 달랜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한편, 유령은 천사 조각상 뒤에서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고,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과 질투에 싸여 복수를 다짐한다. 이성을 잃은 유령은 '일 무토'의 마지막 커튼 콜에서 극장 위 샹들리에를 객석으로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제2막

유령의 소동이 있은 후 6개월 동안 오페라 하우스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 유령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이에 고무된 앙드레와 피르맹은 가면무도회를 열어 오페라 하우스의 새로운 오픈을 축하하게 된다. 크리스틴과 라울은 그 사이 남몰래 비밀 약혼을 한다.

무도회가 무르익을 무렵,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난다. 축하객 무리 속에서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에게 유령은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 '승리의 돈 주앙'(Don Juan Triumphant)을 내놓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품을 오페라 하우스의 재개막 공연으로 무대에 상정하라는 협박을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라울은 유령의 오페라가 공연될 경우, 유령이 무대에 등장하려 할 것임을 간파하고 이 기회에 그를 사로잡을 계획을 꾸민다. 크리스틴은 두렵지만 마지못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칼롯타와 다른 출연자들의 불만이 높았지만, 연습 도중 저절로 피아노가 반주되는 등 괴이한 현상이 잇따르자 두려움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못한다.

'승리의 돈 주앙'은 삼엄한 경비 속에 무대에 오른다. 이윽고 순결한 처녀 아민타가 호색한 돈 주앙의 유혹에 빠져드는 장면에 다다른다. 이 순간 크리스틴은 남자 주인공 피앙지가 어느새 유령으로 바뀌어 있음을 느낀다. 극의 절정에서 크리스틴은 돈 주앙의 망토를 제쳐서 유령이 무대에 나타났음을 알린다. 그러나 라울은 유령이 크리스틴에게 너무 근접해 있어 그녀가 다칠 것을 우려해 경관들의 급습을 막아선다.

순간, 적막이 무대를 가르고,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유령의 가면마저 벗겨버린다. 한편, 무대 반대 쪽에서 목이 매어 살해된 남자가수 피앙지가 발견되고, 그 혼란을 틈타 유령은 크리스틴을 납치해 자신의 지하 은신처로 달아난다.

유령의 만행에 분노한 군중들이 유령을 잡으러 지하세계로 몰려든다. 유령의 은신처에 가장 먼저 다다른 것은 라울이었다. 흥분한 라울은 그러나 유령이 자신의 뒤에 다가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결국 유령이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마법의 밧줄에 목이 매달리고 만다.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자신과 영원히 같이 살든지 아니면 라울의 죽음을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흉측스런 외모와는 달리 순수한 영혼을 지닌 유령의 존재를 이해하게 된 크리스틴은 유령에게 다가가 키스를 한다. 그러나 너무도 크리스틴을 사랑했던 유령은 차마 그녀를 안아보지도 못한다. 유령은 라울을 풀어준다. 이윽고 자신을 사로잡기 위해 군중들이 점점 다가오자 유령은 라울과 크리스틴에게 자신을 남겨둔 채 떠날 것을 요구한다. 이뤄질 수 없는 연인을 태운 채 멀어져 가는 돛단배를 바라보며 유령은 크리스틴의 이름을 슬프게 읊조린다. 이윽고 사람들이 유령의 은신처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유령의 하얀 가면뿐이었다. 그 후 아무도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


연재목차

[세계 뮤지컬런던 런던 웨스트엔드를 가다] ③ 20년, 멈추지 않는 신화-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회)꿈의 공장 런던 웨스트엔드
2회)그룹 퀸과 공상 과학의 만남-위 윌 락 유(We will Rock You)
3회)20년, 멈추지 않는 신화-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4회)뮤지컬, 관능을 노래하다-시카고(Chicago)
5회)사회주의와 록 음악의 충돌-연극 록큰롤(Rock'n Roll)
6회)무대 위로 날아오른 발레 소년-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7회)사생아에서 퍼스트 레이디로-에비타(Evita)
8회)모든 꿈꾸는 것은 이뤄진다-메리 포핀스(Mary Poppins)
9회)혁명 위에 피어오른 인간애-레 미제라블(Les Misearble)
10회)전시회로의 초대-일요일 공원에서 조지와 함께(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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