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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만들기] 31. 잠실섬 일대 매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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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잠실은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한강의 섬이었다. 잠실섬은 신천리.잠실리란 이름으로 조선 중기부터 역사에 등장했다. 임진왜란 전까지 잠실섬은 뽕밭이 무성했으며, 주민의 주요 생계수단은 누에치기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잦은 홍수로 잠실은 이름만 남긴 채 사라지고 쓸모없는 모래섬으로 방치됐다. 잠실의 뽕밭들은 지금의 잠원동으로 옮겨갔다.

잠실섬 일대 한강을 메워 토지를 조성하는 공유수면매립 사업은 규모가 커 서울시에서 직접 맡았다. 서울시는 1969년 1월 건설부에 공유수면매립 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서류를 반려하거나 회신을 미루던 건설부가 70년 중반 '이 사업은 민자로 하는 게 바람직함'이라는 답변을 시에 보내왔다. 정부가 정치자금을 내는 조건으로 대형 건설회사들에 잠실지구 매립사업권을 약속했던 것이었다. 반포지구를 매립했던 현대.대림.극동에 삼부.동아 등이 새로 참여해 잠실지구 공유수면매립을 추진했다.

서울시는 공유수면 매립과 잠실섬에 대한 구획정리사업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모두 2백80여만평이 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지정됐다.

71년 2월 매립을 위한 물막이공사가 시작됐다. 주로 잠실섬의 남쪽을 흐르던 한강 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섬의 동북부 지역을 깎아 광진교쪽에서 흘러오는 물줄기를 뚝섬 쪽으로 돌리는 '하천 절개공사'를 벌여야 했다. 마지막 물막이공사가 그해 4월 15~16일 이틀에 걸쳐 12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 공사를 위해 청평댐 발전소는 발전을 중단, 공사 지점의 수위를 약 20㎝ 낮추고 강물의 속도를 느리게 했다.

물막이공사가 끝나자 잠실섬의 남쪽으로는 강물이 흐르지 않게 돼 잠실은 이제 섬이 아닌 육지로 탈바꿈했다. 이어 매립공사에 들어갔다. 강을 메울 흙이 모자라 쓰레기를 쏟아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이렇게 해 78년 완공된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약 75만4천평의 땅이 생겼다. 잠실섬 구획정리사업 대상을 합쳐 개발 가능한 면적은 약 3백40만평으로 확정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로 개발되는 잠실지구에 국제경기를 치를 수 있는 운동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67년 서울에서 열기로 했던 아시아경기대회를 경기장 등 기반시설 미비를 이유로 반납해 방콕이 대신 치르게 하고 그에 대한 부담금 25만달러를 내는 국제적인 수모를 겪었던 쓰라린 과거가 결심의 동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73년 9월 하순 양택식 서울시장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朴대통령은 잠실에 국제 규모의 체육시설을 만드는 것을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당시 도시계획국장이던 내게 곧바로 전달됐다. 나는 홍익대 박병주 교수에게 아주 적은 용역비를 들여 체육시설 건립 계획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朴교수는 중구 다동에 있는 삼성여관 3층에서 젊은 건축학도 조건영.신기철 등과 함께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나도 퇴근길에 여관에 들러 밤늦게까지 의견을 나누곤 했다. 잠실지구 설계에는 영국의 뉴타운계획과 일본의 다미.센리 뉴타운계획을 참고했다. 삼성여관은 재개발돼 현재 한국관광공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약 한달간의 강행군 끝에 완성된 조감도를 들고 나는 서울시.건설부.중앙도시계획위원회.총리실 등에 설계안을 설명했다. 朴대통령에게는 梁시장이 직접 보고했다.

면적 3백33만평, 인구 25만명을 수용하는 내용의'잠실 뉴타운계획'은 커뮤니티의 유기성, 높은 수준의 교육시설, 충분한 오픈스페이스, 입체적 공간 조성과 랜드마크, 주거형식의 다양성, 원활한 교통체계 등을 추구했다. 이 계획은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많은 도시설계에서 하나의 모델이 됐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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