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칼럼

KTX와 빨대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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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요즘 부산의 종합병원 의사들 사이에는 "돈을 추렴해 지율 스님 공덕비라도 세우자"는 농담이 유행이다. 지율 스님의 단식으로 천성산 터널 공사가 지연되면서 한숨을 돌린 쪽은 도롱뇽보다 부산 의사들이다. 고속철도(KTX) 개통 이후 대전은 물론 대구까지 종합병원들이 죽을 쑤고 있다. 조금 중한 병으로 판정나면 죄다 서울 큰 병원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산은 좀 낫다. 이들도 "대구~부산 간 KTX가 완공되면 남의 일이 아니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대구와 부산 사이의 경남 밀양시는 낙동강을 낀 알짜 농촌이다. 다만 교통이 불편한 게 흠이었다. 이런 밀양에 매일 13편씩 KTX가 정차하고, 지난해에는 새로운 부산~대구고속도로가 완공됐다. 과연 살판났을까. 밀양시청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기대와 달리 현실은 너무 실망스럽다." 밀양 인구는 자꾸 줄어들어 11만2000여 명이다. 얼마 전에는 밀양병원까지 폐업했다. 20분이면 부산이나 대구에 갈 수 있으니 고향에서 칠순 잔치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물론 KTX로 재미를 본 쪽도 없지 않다. 관광객의 급증으로 "표충사와 얼음골만 큰 재미를 봤다"는 소문이 나돈다.

KTX가 개통되면서 수도권과 지방의 물리적인 통행시간이 짧아졌다. 경제적인 거리도 단축되고 심리적인 거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당초 기대한 수도권 분산이나 지방 균형발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수도권의 강력한 흡인력에 지방이 쪼그라드는 '빨대효과'만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병원.쇼핑.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도권 집중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KTX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지방 균형정책도 희석될 공산이 크다. 이미 지방 근무자들 사이에는 주말에 서울 집에 들르는'금귀월래(金歸月來)'라는 두 집 살림이 보편화되고 있다.

빨대효과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오사카 상인에겐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은 지킨다'는 철칙이 있다. 저마다 독특한 상호가 그려진 노렌은 가게 앞에 내거는 무명천이다. 한 곳에서 대대로 신용을 쌓는 게 노렌의 전통이다. 좀체 가게를 옮기지 않는다. 그러나 신칸센이 뚫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마쓰시타전기.아사히 맥주 등 오사카 굴지의 기업들이 도쿄 쪽으로 옮겨갔다. 오사카는 인구도 줄고 경제적 비중도 축소되고 있다. 다만 나고야 정도가 예외일까. 도요타자동차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나고야는 신칸센 파급효과를 제대로 누리면서 인구도 증가하는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힌다.

노태우 정부 이후 20년 동안 그 숱한 지방개발 공약에도 불구하고 성공 케이스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탄탄한 지방 산업도시인 울산.포항.창원.구미.광양 등은 박정희 정권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과 함께 탄생했다. 영남 쪽에 치우쳐서 탈이지, 나름대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나고야의 성공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지방을 살리는 관건은 KTX나 신칸센보다 내실 있는 기업체와 일자리, 교육 및 문화적 여건이라는 말이다.

최근 정부가 2017년 완공을 목표로 10조원 규모의 호남 고속철 계획을 확정했다. 노 대통령이 "경제성만 따질 일이 아니다"며 작심하고 밀어붙인 사안이다. 더 이상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벌써 KTX 정차역으로 뽑힌 6개 도시에는 환호성이 가득하다. 그러나 빨대효과가 걱정이다. 정치적 의도가 듬뿍 담긴 이 '선물'이 단물만 쪽쪽 빠는 당의정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기업부터 먼저 집어넣어 보겠다는 기업도시.혁신도시는 답보상태다. 기업은 안 들어오고 땅값만 올라버렸다. 정부는 기업도시 투자를 출자총액제한에서 풀고 연.기금과 펀드 투자까지 허용했지만 참여 기업을 찾을 수 없어 허덕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KTX와 고속도로만 넓힌다면 그야말로 빨대효과만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뭔가 단추를 잘못 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