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7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공청서 「학병학살」 보복계획/“피의 악순환 부른다” 이철승 암살계획 만류
학병동맹 강당의 창밖 눈위에는 또 한 학생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이것이 해방된 나의 조국 서울인가. 일제시대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일제때는 악법이라도 법이 있었다. 일제는 고문으로 사람을 죽여도 시체는 가족에게 돌려주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승려를 불러 장사를 치러주었다. 그런데 우리 경찰이 사람을 죽이고도 가족에게 알리기는 커녕 이렇게 시체를 그대로 둘수 있는지 나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의 애국 선열들이 이런 나라를 만들려고 피를 흘리며 희생되어 갔을까. 나는 사촌동생의 죽음에 너무나 분하고 기가 차서 처음에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찬마루 바닥에 누워있는 동생을 쳐다보니 그때서야 눈물이 쏟아졌다.
벌써 날은 어두워 캄캄해지는데 나혼자서는 두 시체를 거둘수 없어 사람을 찾아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나 혼자만이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알게된 것 같았다.
일제때는 그렇게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해방만 되면 우리겨레가 오순도순 화목하게 잘살 것이라고.
그러나 해방이 되고 보니 우리동족끼리가 일본사람들보다 더 잔혹한 것 같았다.
나는 슬픔과 절망에 싸여 해방일보로 뛰었다. 곧 공청과 혁명가구원회를 동원해 학병동맹으로 보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시체가 하나 더 발견되었다.
1월20일은 전국 학병대회가 예정됐던 날이었다. 그 준비를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학병출신자 1백40여명이 18일밤 학병동맹 회관에 유숙하고 있었다.
16일낮 반탁학생들의 조선인민당,서울시 인민위원회,조선인민보사 습격에 이어 19일 새벽 3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직접 지휘아래 무장경찰대가 학병동맹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이때 피살된 학병출신자는 박진동ㆍ김성익ㆍ김명근 등 3명이었다.
학병동맹에서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자리가 일제때 교원연수소였기 때문에 그들이 군사훈련때 쓰던 목총 10여정과 일본도 한자루가 있었다 한다. 경찰에서는 학병동맹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했으나 조선 신문 기자회에서 조사발표한 대로 무기는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학병동맹 회관 가까이에 일제때 부터의 친일부호 민모의 저택이 있었다. 학병동맹에서 회의때 식기가 모자라 그 집에 쟁반을 몇개 빌리러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민모는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좌익을로 알려진 학병동맹이 식기를 빌리러오자 겁이 나서 장택상에게 『학병동맹에 식기를 빼앗겼다.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하다』고 호소했던 모양이다. 당시 학병동맹은 군정청과 보수진영에 있어서는 거북한 존재였다. 또한 16일 반탁 학생들의 테러에 대해 보복을 준비한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이에 장택상은 그것을 구실로 삼아 하지 사령관에게 『학병동맹은 민모씨의 집에와서 식기를 강탈해간 강도』라고 보고해 해체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한편 공청과 청년총동맹에서는 합병동맹 학살에 대해 보복할 준비를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어느날 공청간부 한명이 내가 박진동의 형인줄 알고 『1월29일 학병동맹 희생자 장례전날까지 우익학생의 리더인 이철승을 없애버릴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보복사건이 일어나는것을 제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테러가 테러를 부르고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나는 곧 권오직을 찾아갔다. 그는 공청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지시를 한일은 없다고 했다. 나는 김삼용을 찾아가서도 『절대 보복테러는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29일이 지나서도 좌익에서 보복테러가 없고 이철승이 살아있는 것을 알고 나는 안심할수가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