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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혜능보육원/87세 왕도윤 원장(마음의 문을 열자:1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3년간 외길 걸어온 「고아할머니」/밥짓고 빨래… 92명 뒤바라지/전현직 저명인사 원생출신 감춰 서운
『어제밤엔 우리아빠가/다정하신 모습으로/양손에는 크레파스를/사가지고 오셨어요.』
즐거운 동요가락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꼬마들.
그러나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의 눈꼬리에는 이슬이 맺혔다.
6세짜리 코흘리개 경식이가 『엄마랑 아빠랑 함께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보육원장 왕도윤할머니(87)에게 떼를 쓰자 제법 큰 원생들까지 노래를 멈추고 시큰한 콧 등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경식이가 보육원에 들어온 것은 88년4월. 광산에서 석탄을 캐던 아버지는 바람이 난 어머니와 합의 이혼한 뒤 고향 청원에 돌아와 술로 밤을 지새웠다.
쪼들리는 가난속에서 아버지마저 뺑소니차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되는 바람에 『없는 살림에 입이라도 줄여야 한다』는 이웃들의 손에 끌려 형 경원(8)이와 함께 보육원에 넘겨진 경식이.
전교에서 1등을 다투던 큰형 경진이(12)도 1년동안 학교를 그만둔채 움막집에서 아버지 병간호를 하며 버티다 허기끝에 쓰러져 동생들을 뒤따라 지난해 봄 같은 보육원으로 옮겨왔다.
경식이 3형제처럼 가난에 내몰리거나 아예 부모가 없는 고아 92명의 집인 충북 청원군 옥산면 혜능보육원. 이곳 왕원장은 27년 고아 18명을 모아 기른 것을 시작으로 63년동안 오로지 한길로만 걸어온 「고아할머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중앙물산회사라는 큰 회사를 경영하던 남편 여규필씨와 함께 고아원을 시작,그동안 길러낸 고아들이 줄잡아 1천여명.
『남편과 사별한 해방직후 모든 재산을 정리해 전쟁 고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시작했다』는 왕할머니는 슬하에 친자식이 없어 더 큰 애정으로 손수 밥과 빨래를 하며 뒷바라지를 한다. 전 내무부장관 K씨,서울 M여고 교장 J씨,조흥은행 지점장 L씨 등이 이곳 출신.
그러나 대개 세상에 얼굴이 알려진 원생출신들 일수록 한번 떠난 이후로는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아직 사회에서 고아출신이란 배경을 떳떳하게 내놓지 못할 분위기 때문일게야. 하지만 그저 잘 자라준 것만도 내겐 고마워. 대가를 바라고 나선길은 아니었으니까.』
왕할머니는 이 보육원 출신으로 청주에서 과일행상을 하는 이영상씨(29) 부부가 아들을 안고 팔다남은 과일을 든채 보육원에 들를때 가장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현재 전국 6백26개소의 보육원에서 자라는 고아들은 모두 7만7천여명.
사회의 한쪽에서 부모들의 과보호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오늘도 이들 고아들은 사회의 두터운 편견의 벽에 부닥쳐 신음하고 있다.
왕할머니는 지난해 12월 8년동안 죽은줄로 알았던 부모가 갑자기 나타나 『이제 다 컸으니 식모라도 시켜 집안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태야 겠다』며 윤모양(14)이 끌려갈때 슬픈 뒷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왕할머니를 더욱 슬프게하는 것은 원생 가운데 하나가 잘못해도 「고아들은 다 그렇다」며 싸잡아 손가락 질할 경우.
가장 평등해야할 학교에서 조차 새 학기때마다 원생들을 입학시키려 하면 교사들이 서로 담임을 맡지않으려 한다고 씁쓸한 표정이다.
『요즘들어 바깥세상의 유혹이 커지는게 더 문제야. 중학교도 안마친채 돈벌겠다며 몰래 짐을 싸서 서울로 내빼는 경우가 날이 갈수록 많아져.』
왕할머니 말처럼 혜능보육원에는 50명이 넘는 국교취학 아동이 중학교 때는 20명,고교생은 10명으로 크게 줄어들어 버린다.
『햇볕은 응달일수록 더욱 그리운게야.』
63년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단한번도 해외입양은 시키지 않은 왕할머니가 그동안 체험으로 터득한 교훈이다.<청원=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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