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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포럼

카피 앤드 페이스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저녁 모임은 서울 도심의 조촐한 음식점에서 있었다. 세상의 흐름을 잘 읽는 행정학자.공직자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교수 몇 분과 정부 관계자가 포함돼 있다 보니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의 사퇴 건이 맨 먼저 술안주로 올랐다. 원로 교수가 입을 뗐다.

"김병준씨, 해도 너무 했어. 의혹이 한식 상차림처럼 많으니…."

다른 교수가 이어 받았다.

"논문 표절 의혹에 중복 게재까지…. 관행이라고 우겼으니 교수 망신 다 시켰죠."

김 전 부총리에 대한 성토는 오래가지 않았다. 후임 인선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원로 교수가 연배가 한참 아래인 정부 관계자에게 물었다.

"새 부총리 물색은 잘 돼 가나?"

"어렵습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사퇴 계기가 고약해서…. 접촉하는 교수분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요. 논문 시비에 걸려들까봐서요."

축재.병역미필도 아닌 논문 문제로 교육수장감인 교수들이 떨고 있다니, 웃기지 않는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5년 전 교육부 장관 자리가 부총리급으로 올라간 이후 교육계 수장을 맡았던 사람은 7명이다. 김진표씨를 빼고는 모두 교수 출신이었다.

막걸리 몇 잔이 돌아갈 무렵, 참석자들의 얘기에도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교수 사회가 표절과 연구윤리에 너무 둔감했던 게 사실이죠. 문제가 돼도 서로 봐주고요. 나이 든 교수일수록 더 자유롭지 못하지요."

"제가 아는 한, 서울 시내의, 적어도 두 대학은 어떤지 아세요. 논문 심사를 호텔에서 한대요. 심사비로 100만원씩 받고요. 제자 논문을 깐깐하게 지적할 수 있겠어요?"

"학생들은 더 해요. 숙제 내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인터넷에 들어가 500원, 1000원을 주고 '족보' 리포트를 다운받아 대충 베끼고 오려 붙여 제출하는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밤이 깊을수록 술판의 목소리는 하나가 돼 갔다. 돌아가면서 표절과 저작권 침해가 횡행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김 전 부총리의 '관행론'도 그냥 내칠 주장만은 아니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자 원로 교수가 나서 선을 그었다.

"누군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겠어? 소위 지식의 수호자라는 교수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양심적인 교수.연구자가 얼마나 많아.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김병준씨를 감싸기보다는 반성을 해야지. 뭔가 교훈을 얻고 결의를 다져야지."

다른 교수들도 동의했다.

"우리, 유학 시절 어땠습니까. 한국식으로 출처를 흐린 리포트를 냈다가 교수에게 불려가 'Why did you copy it ?(왜 베꼈느냐)'며 혼나지 않았어요? 우리도 그렇게 가르쳐야죠."

"국내 대학, 어디 한 곳도 세계 100위 안에 못 든다잖아요. 대충 쓰고 봐주는 식으로는 일류 대학이 될 수 없죠. 선진사회가 될 수도 없고요. 더 깐깐해져야 합니다."

자리가 끝날 무렵, 참석자들은 표절 문화를 지식 사회의 병원균이요, 범죄로 규정했다. 술기운은 필자를 포함한 모두를 정열적인 의사요, 수사관으로 만들었다. 순간, 얼마 전 정부가 전국 초.중학교에 배포한 책자의 제목이 생각났다. '카피 앤드 페이스트(copy & paste)'였다. 인터넷에 들어가 '복사 & 붙여넣기'를 반복하고 공짜로 저작물을 내려받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풍토를 다룬 책이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논문 표절과 중복 게재, 리포트 베껴 쓰기, 아이들의 숙제 관행…. 지식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칼럼을 써보기로 작정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인터넷에 접속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어느새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Ctrl+C ' 키 & 'Ctrl+V' 키, 'Ctrl+ C '키 & 'Ctrl+V' 키…. copy & paste, copy & paste….

이규연 탐사기획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