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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주자들의 가을 준비 ② 김근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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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에어컨 찬바람을 쐬면 콧물이 흐르고 코가 막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1985년 가을이 막 시작되던 9월 초에 당한 전기고문의 후유증이다.

김 의장에게 여름나기는 항상 힘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젊은 시절 공안 당국에 당한 고문은 주로 여름에 있었다. 이 때문에 거의 해를 거르지 않고 여름엔 며칠씩 몸져누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그런 증상은 사라졌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거뜬히 여름을 넘겼다. 당 의장이 된 6월 이후 올 여름에도 건강하다. 대권을 꿈꾸는 그에게 고문의 추억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김 의장에게 더위타령은 사치다. 당 지지도가 바닥이고 대권 주자 중 그의 지지도도 최하위권이다. 덥다고 '좀 쉬어 가자'고 할 때가 아니다. 아침 5시쯤 일어나, 피를 맑게 한다는 가시오가피즙과 토마토를 먹고 집을 나선 뒤 숨 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해 낸다. 공식 일정 말고도 수시로 당내외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참모들과 회의를 한다.

김 의장이 취임 뒤 생긴 불만 한가지. 일요일 조기축구 일정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매주 동네 '파랑새 축구단'에서 몸 만들기를 해왔다. 하지만 의장이 된 이후 참석을 못했다.

부인 인재근씨가 "보좌진이 시간을 안 잡아 주니 축구를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전할 정도다. 지난달 30일엔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이끄는 이 대학 교수팀과 경기를 하기로 했지만 김 의장이 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취소됐다. 대신 9월 2일로 다시 경기날짜를 잡아놨다. 팀 내에서 김 의장의 포지션은 '원 톱 스트라이커'다. 김 의장은 "대학시절 데모를 하러 가야 하는데 친구들이 농구를 하자고 하면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사실 농구를 하러 간 적도 많다"고 할 만큼 운동을 좋아한다. 그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 맨손 체조로 조기 축구를 대신한다.

6월 당의장에 오른 뒤 그는 두 번의 큰 고비를 맞았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인사 파동과 '문재인 법무부 장관 기용 논란'이었다. 처음엔 노무현 대통령과 정면 충돌하며 최악의 당.청 관계를 형성할 듯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당의 뜻을 관철시켰다.

파동 뒤 김 의장은 "깔딱고개를 넘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6일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공개 면박'을 당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곳곳에서 대통령의 힘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내 입지가 탄탄하지 않다. 그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 세력이 적지 않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가 공을 들이고 있는 카드가 바로 '뉴딜'이다. 경제인에게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의 혜택을 주는 대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게 하자는 제안이다. 청와대보다는 당, 당보다는 민심을 생각해 내린 결단이라고 한다.

김 의장은 뉴딜에 모든 걸 걸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물러날 데도 없다. 하지만 뉴딜에 대해선 청와대와 정부 모두 시큰둥하다. 재계 역시 반신반의하는 눈치다. 16일엔 한국노총을 찾아 노동계가 불법시위 중단, 과도 임금인상 요구 자제 등에 나서면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잡(job) 딜'을 제의했지만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재계엔 사면과 출자총액제 완화를 꺼냈는데 노동계엔 무슨 카드를 제시했느냐"는 반발도 나왔다.

김 의장은 당내 재야파의 수장이다. 그의 주변에는 중진인 장영달.이호웅 의원과 이인영.오영식.유승희 의원 등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문용식 한반도재단(김 의장이 운영하는 연구소) 사무총장도 핵심 참모다. 하지만 요즘 그들의 얼굴이 김 의장 옆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김 의장과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재계 출신인 이계안 비서실장이다. 현대차 사장을 지낸 그가 재야 운동가 출신인 김 의장과 조화를 이룰 줄은 당내에서도 예상치 못했다. 원혜영 사무총장, 이목희 전략기획실장, 우원식 사무부총장, 우상호 대변인도 전면에서 '뉴딜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

김 의장의 좌우명은 '정자정야(政者正也)'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란 뜻이다.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승리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으로 새긴다고 한다. 당내엔 청와대 오찬에서 노 대통령과 "계급장을 떼고 담판을 지었어야 정치적으로 떴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당의장이 된 뒤 그는 매주 화요일이면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이 원칙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지하철에서 민심을 피부로 느끼면서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세워 보고 싶어한다. 이 같은 그의 마음이 가을에는 '지지도 상승'이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신용호.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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