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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신기원 연 80년대 한국스포츠 - 로마영광 겨냥하는 『붉은 땅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꿈의 구연(구연)」월드컵축구 본선의 2회 연속출전,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 선수권대회 4강.
한국축구가 80년대에 국제무대에서 올린 혁혁한 전과다.
엄청난 오일달러를 배경으로 급성장한 중동세에 밀려 한때는 아시아 정상권에서조차 밀려났던 한국축구는 이같은 성과로 아시아 최강자리를 굳히면서 90년대에는 세계무대 도약을 바라보고 있다.
풍운아 이회택(이회택)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이 지난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90년 이탈리아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중국·북한 등을 제치고 당당히 본선진출권을 따내자 아시아국가들은 한국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국제축구계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게 됐다.
아시아국가들은 한국의 로마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월드컵 본선진출을 세번씩이나, 그것도 2회 연속출전이라는 아시아초유의 기록을 세우자 질시와 함께 찬탄을 보내고있는 것이다.
한국은 말레이시아·싱가포르·네팔등 비교적 약체팀들과 대결한 5월 아시아 4조예선에서 6전승 25득점 무실점을 기록하며 싱가포르 최종예선전에 기세좋게 진출했다.
그러나 한국은 최종예선전에서 스타트가 부진, 쉬운 상대로 여기던 카타르의 수비작전에 말러 득점없이 비김으로써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한국은 두번째 경기부터 저력이 되살아나 북한을 맞아 루키 황선홍(황선홍)의 헤딩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상승무드를 타기 시작해 최순호(최순호)를 비롯, 박경훈(박경훈) 정용환(정용환)등 노장트리오가 컨디션을 되찾으면서 중국(1-0) 사우디아라비아(2-0)등을 연파, 여유있게 본선에 오른 것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마지막 UAE(아랍에미리트)전에서 1골(1-1무승부)을 허용, 아깝게 무실점의 기록이 깨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아시아예선에서 9승2무 30득점1실점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올림으로써 아시아는 물론 국제축구계로부터 주목을 끌었다.
이보다 앞서 한국축구가 국제축구계에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86년 멕시코월드컵 본선대회.
숙명적 라이벌인 일본을 꺾고 32년만에 본선에 올랐던 한국은 예선리그에서 세계정상급 팀들에 의외로 선전, 동방의 작은 나라정도로만 알고있던 국제축구계에 한국축구의 인식을 새롭게 했다.
김정남(김정남)감독이 이끈 대표팀은 이 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와 첫경기에서 격돌, 3-1로 지기는 했으나 박창선(박창선)이 월드컵사상 첫골을 터뜨리는 등 분전했다.
한국은 동구강호 불가리아와의 두번째 경기에서 김종부(김종부)의 동점골로 예상을 뒤엎고 비겨 잔잔한 충격파를 던지더니 82년 대회우승팀이자 세계최강중 하나인 이탈리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최순호·허정무(허정무)의 골로 3-2까지 따라붙는 대접전을 펼쳐 세계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비록 예선탈락으로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했던 한국축구는 멕시코월드컵을 통해 경기경험과 자신감을 얻은 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월드컵대회에서 이처럼 좋은 결실을 얻게된 것은 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이룩한 4강신화가 밑거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박종환(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 대표팀은 멕시코고원에서 펼쳐진 A조예선에서 스코틀랜드와의 첫경기에서는 졌지만 두번째 경기부터 특유의 기동력으로 승리를 이끌어 돌풍을 예고했다.
홈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노인우(노인우) 신연호(신연호)의 골로 2-1로 신승한 한국은 여세를 몰아 호주와의 경기에서 김종부가 혼자 2골을 터뜨리는 수훈으로 2-1로 승리, 8강에 오르며 「꼬레아 선풍」을 일으켰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11명의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헤집고 다녀 「붉은 땅벌」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한국은 준준결승에서 또 한번의 파란을 연출, 세계축구계를 경악시켰다.
한국은 남미축구의 명문 우루과이와 격돌, 선제골을 터뜨린 신연호가 연장전에서도 천금같은 결승골을 뽑음으로써 축구사상 세계무대에서 처음으로 4강에 으르는 신화를 창출해낸 것이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에 2-1로 역전패, 3∼4위전으로 밀려 연장전 끝에 폴란드에 패해 4위에 그쳤으나 파장은 엄청났다.
당시의 주역인 GK 이문영(이문영)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전들은 그후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한국축구의 탈아시아의 밑바탕이 되었다. <임병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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