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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9. 빅 브라더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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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1년 9월 10일. 아프가니스탄 서부 칸다하르의 동굴에 숨어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은 위성전화 스위치를 켰다.

그의 위성전화가 인도양 상공에 떠 있는 통신위성 인마샛(Inmarsat)을 통해 알카에다 동료와 연결이 되는 순간 아프가니스탄에서 1만1천km 떨어진 미국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 소재 국가안보국(NSA) 컴퓨터에도 번쩍 불이 켜졌다.

NSA의 도.감청용 컴퓨터는 흥분된 어조로 "엄청난 사건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테러리스트들의 통화 내용을 고스란히 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러나 9.11의 대참변을 예고한 문제의 통화는 그로부터 48시간이 지나도록 중앙정보국(CIA)의 조지 테닛 국장에게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CIA 국장을 역임한 제임스 울시 등 미 정보 전문가들은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가 외국어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2천7백92명의 인명을 앗아간 9.11 테러 직전에 이뤄진 문제의 통화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사용하는 파슈툰어로 돼 있었는데 당시 NSA에는 파슈툰어를 구사하는 요원이 단 한명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초대형 '정보 실패'를 계기로 자신의 진로를 바꿔온 나라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거대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유럽에 비하면 국제감각과 세련도가 떨어지는 '촌뜨기'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라는 치명적 정보 실패를 계기로 미국은 태평양 전쟁과 나아가 2차 대전에 뛰어들었고, 초강대국으로 탈바꿈했다. 그 뒤에는 항상 정보기관이라는 '그림자 제국'이 있었다.

정보기관 하면 바로 CIA가 연상되지만 CIA는 미 연방정부 산하 13개 정보기관의 하나일 뿐이다. 지난해 경우 CIA는 미국의 전체 정보예산 3백억달러(36조원)의 10% 정도만을 사용했다. 정보예산의 대부분은 최첨단 첩보위성을 운용하는 국방부 소속 국가정찰국(NRO)과 국가영상.지도제작국(NIMA), 그리고 NSA 등이 사용한다.

특히 NSA는 '그런 기관은 없다(No Such Agenc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기관이다. 3만여명의 요원이 CIA 예산의 두배가 넘는 70억달러를 매년 사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수학자를 고용하고 있는 NSA는 전 세계적인 도.감청 네트워크인 '에셜론 (Echelon)'과 1초에 1천의 6승(乘)까지 계산이 가능한 엑사플롭(Exaflop)급 수퍼 컴퓨터로 외교기밀은 물론 수백만통의 전화.팩스.e-메일 등을 매일 도청, 해독한다. 한국에도 8개 감청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NRO가 운용하는 첩보위성은 지상 수백km 높이에서 축구공 크기 물체의 움직임까지도 정확하게 포착해 낸다. 최근 개발된 무인정찰기 프레더터의 위력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이미 입증됐다.

최근 워싱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로 등장한 '메인 에니미(The Main Enemy)'에서 CIA 중동 지부장 출신인 밀턴 비어든은 "우리는 지난 50년간 아시아.중동.중남미에서 끊임없이 소련의 KGB와 쟁패를 벌였다"고 증언한다. 지구상의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이룩한 '팍스 아메리카나'는 '그림자 제국'에서 벌인 사투에서 승리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91년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잠시 힘을 잃었던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9.11을 계기로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이라는 엄청난 정보 실패에도 불구하고 테닛 CIA 국장은 물론 단 한명의 정보 간부나 요원도 경질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시 대통령은 2003년도 CIA 예산으로 50억달러를 배정했다. 전년도에 비해 50% 이상 증액한 것이다.

또 9.11이 외국어 요원 등 '인적 정보(Humint)'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외국어에 능통한 소수인종 출신 요원을 대거 증강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9월 CIA에 전 세계 80여개국에서 비밀활동을 허가하는 극비지령을 내렸다. 워싱턴의 정보 전문가 존 파이크는 "CIA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빅 브라더'가 다시 눈을 부릅뜨고 세계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적극적인 옹호에도 불구하고 9.11은 CIA에 씻기 어려운 이중 부담을 안겼다. 정보 실패도 실패지만 정보조작 의혹 때문이다. CIA 요원들은 자신들이 가장 금기시하는 행위를 "쿡 더 북(Cook the Book)"이라고 말한다. 정보조작 유혹에 대한 경고다. 정보의 최종 소비자인 대통령 등 정책결정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정보를 부풀리거나 윤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1월 28일 국정연설에서 대(對)이라크 공격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정보는 "영국 정부는 최근 사담 후세인이 상당량의 우라늄을 아프리카로부터 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딱 13단어(영어 기준)로 된 한 문장에 불과했다. 부시 대통령이 슬쩍 비틀어 개전 명분으로 활용한 이 CIA 정보는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이라크인 수천명의 살상, 수백억달러의 전비(戰費), 그리고 국제질서의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46년 9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 같은 정보 실패를 막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받기 위해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7년이 지난 오늘 CIA는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을 합리화하기 위한 정보조작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국제판 편집장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인 망명자의 정보 조작에 말려들어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며 "북한의 핵 정보가 부풀려졌다면 그 진원지는 CIA가 아니라 백악관일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팀과 만난 케네스 퀴노네스 전 국무부 북한 데스크는 "미 정부가 북한의 핵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리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워싱턴=특별취재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배명복 기획위원, 김민석 군사전문위원, 심상복 뉴욕특파원, 김종혁.이효준 워싱턴 특파원, 김진.최원기 국제부 차장, 신인섭 사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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