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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 10년 미술시장] 上. 빈사의 미술 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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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문자 문화가 퇴각한 이 시대 시각예술의 근본이 미술이다. 산업디자인 등 인근 장르에 주는 파급효과도 주목되는 이 견인차 장르인 미술 시장이 1990년대 초반 이후 10년째 침체 일변도다. 깊은 늪 속의 현대미술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를 두고 현황을 살펴보고 대안을 제시하는 시리즈 '침체 10년 미술시장'를 연재한다. [편집자]

호시절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던 그때는 과장없이 자고나면 그림 값이 올랐는데, 서양화가 장욱진의 경우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보통 5호 내외의 작은 그림을 그렸던 그의 1989년 말 작품 값은 점당 1천5백만원 수준. 이것이 이듬해 4월에는 4천만원으로 껑충 뛰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그의 라이벌인 서양화가 박고석의 현대화랑 개인전 때 매겨진 작품 값 수준으로 간단하게 상향 조정을 한 것이다.

미술시장이 후끈 달아올랐던 80년대 말 90년대 초 장욱진 작품 값은 고공비행을 거듭했다. 이규일('아트 인 컬처'발행인)씨 증언에 따르면, 그해 7월에 6천5백만원을 호가하더니 12월 타계 직후 드디어 1억원을 돌파했다. 그림값 폭발은 그뿐 아니라 당시 인기작가 그룹 대부분이 그랬다.

부동산 투기대책이 연이어 발표되던 그때 뭉칫돈 일부가 재테크 차원에서 미술시장으로 흘러들었고, 작품이 없어서 못팔던 시절이었다. 겨우 70년대에 상업화랑이 생겨나 막 정착했었음을 염두에 두자면 그건 분명 이상과열이었다. 또 거품 붕괴 직전의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랑들은 달콤함을 즐겼다.

89년말 화랑협회 가입 화랑 50여개가 91년들어 2백여개로 '빅뱅'했던 것도 그 무렵. "일단 투자부터 하세요"라며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그러나 안목없는 컬렉터들을 부추겼던 화랑들은 미처 몰랐다. 93년 이후 작품값 거품이 급격하게 빠지면서 '잃어버린 미술계 10년'으로 직결될 줄은….

그것은 일본경제 거품 붕괴와 흡사한 상황이었다. 이후 현재까지 화랑가는 황량하다. 실물경제 흐름과 상관없이 꿈쩍도 않는 '빙하기 10년'은 혹독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두 개의 해일이 거푸 미술동네를 덮쳤다. 하나는 턱없는 시장과열 현상을 빚던 시장을 어느날 갑자기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 97년 미술시장 개방, 다른 하나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그것이다.

이후 재테크 차원에서 컬렉션을 했던 이들이 작품을 되팔려고 화랑에 나왔을 때 그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어느 정도 가격 추락을 각오했지만, 문제는 거래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장기적 안목에서 컬렉터 보호와 시장 유지에 관심이 없었던 화랑들이 작품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때 이후 미술품은 재테크는커녕 환금성(換金性)이 없음이 확인돼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지금까지도 박수근.이중섭.김환기.천경자 등 국민작가급인 4~5명이 아니면 거래 자체가 어렵다.

왕년의 인기작가 권옥연.변종하.이만익.김흥수.이상범.변관식.노수현.오지호.도상봉 등도 그렇다. 경매에 내놓을 경우 예전 구입가의 반토막이 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시장침체는 다름아닌 화랑들이 원인제공을 한 셈이다. 그 구체적인 현상이 미술계 최대 현안인 '리세일 마켓(재판매 시장) 실종이다.

본디 미술품은 일반공산품이나 소비재와 구분된다. 따라서 싫증이 났거나 바꾸려할 경우 되팔 방법이 없으니 컬렉터들이 국내 미술을 외면하는 것이다.

시장 자체가 복잡한 이중가격의 정글인 데다, 환금성이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확인한 컬렉터들은 두번 다시 화랑에 얼씬하지 않는다. 때문에 젊은 작가들의 작품판매를 포함해 미술시장 자체가 급격하게 얼어붙어 현재까지 10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과거 청산 없이 미술시장은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런 배경이다.

최병식 경희대 교수의 추산으로 국내 컬렉터는 1천5백명 수준. 한해에 작품 3~4점을 구입하는 개인을 포함하고 여기에 미술관.기업 등 기관 컬렉터들을 포함한 숫자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화랑.작가들이 출혈을 감수하고 전시회를 여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러면 국내 미술시장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연매출액은 많이 잡아 2천억원대로 추산된다. 그러나 대형건물 한켠에 의무화된 공공조형물을 제외한 순수한 작품 거래액은 1천억원을 훨씬 밑돈다.

"그 액수는 로또 서너번 당첨되는 액수"라고 화랑들은 자조한다."10년 전 번 돈으로 겨우 버틴다"는 푸념도 거듭 들린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역시 현대미술이다. 시각예술의 총아이자, 산업디자인 인근 장르에 주는 파급효과도 주목되는 견인차 장르다. 이 장르 활기 부족은 길게 보면 국가 경쟁력과 관련된 사안이다. 무엇보다 교양과 문화의 척도인 현대미술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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