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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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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기 때문에 이민 온 송 양으로서는 연일 반복되는 이 말이 가슴을 짓눌러 발걸음이 여간 무겁지 않다.
『내가 만일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정도의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하면 부모들이 얼마나 실망 하실까』
2개월 넘게 ESL (English as Second language) 어학 반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으나 「말문」이 트이기에는 까마득해 걱정에 싸여있다.
부모와 언니·오빠 등 송 양 네 5가족이 서울의 중상류 생활을 청산하고 말이 투자 이민 일뿐 뚜렷한 생활목표도 없이 이곳으로 이민 온 것은 3개월 전.
고3이 된 송 양의 성적으로는 그의 언니·오빠처럼 일류대를 넘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송 양의 부모가 마침내 「교육 이민」을 감행한 것이다.
명문 사립 대를 나와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던 송 양의 언니와 역시 명문 사립 대 2학년인 오빠도 함께 이민 온 만큼 송 양의 심리적 부담은 더욱 겹친다.
그래서 서울로 되돌아가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캐나다로 올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고있으나 부모에게 감히 말을 꺼낼 수 없다.
게다가 얼마전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아버지가 『큰 아이들은 명문대를 다녔는데 막내딸만 2류 나 3류 대에 들어가면 행여나 엇 나갈까봐…』하던 이야기를 스쳐 들은 후 소화불량에다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닌가 싶어요』
밤11시가 지나서야 조그만 잡화상 문을 닫고 귀가하던 차안에서 수심에 찬 부인의 얘기를 들은 이 모씨 (52) 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학교 1, 2 학년 짜리 연년생 아들과 초등학교 5학년 딸의 앞날을 위해서는 「교육이민」이 최선의 길이라고 우겨 지난 1월 밴쿠버 시에 이민 올 때까지만 해도 부인은 자신만만했었다.
그런 부인이 이민 6개월이 지나자 『과연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길을 선택한 건지 자신이 없다』며 점점 긴 한숨을 자주 내쉬는 것이 아닌가.
이씨 부부는 오전 7시부터 밤11시가 넘도록 가게에 매달리다보니 아이들의 공부를 돌봐줄 겨를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하며 얘기조차 나눌 기회도 드물다.
여기다 자녀들은 아직도 언어 소통과 문화 갈등 때문에 꽤 고생스러워한다. 그런데 얼마 전 중1 아들이 수학 숙제를 풀다 아버지에게 전화로 물었으나 시원치 못하자 짜증스레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아들의 행동이 못마땅해 버릇을 고쳐줘야겠다며 이씨가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나무라자 아들은 『도대체 왜 우리가 원하지도 않은 「억지 이민」을 와서 이 고생이냐』고 오히려 대들어 그제야 부인이 걱정하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대입 재수생이던 딸과 고3 아들, 중3 딸 등 3남매를 데리고 5년 전 토론토 시로 이민 온 김 모씨(52) 부부는 「교육이민」으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케이스.
한국에서는 엄청난 대입 레슨 비와 뒷바라지 부담 때문에 미술 대를 포기하고 인문계에 진학하려다 실패한 맏딸은 온타리오 대 미술대학 졸업반으로 적성을 살렸고 아들은 워털루 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 2학년인데도 벌써부터 유수한 회사들이 서로 데려 가려고 점을 찍고 있다.
부모들이 자녀들과 찾은 대화로 이국 문화에 적응토록 하면서 점수보다 적성을 살리도록 해준 덕에 고3 막내딸도 공부를 잘해 명문대 입학을 무난히 점쳐 「교육이민」 교포들이 자녀 교육문제를 상의하려고 하루에도 2∼3명씩 김씨 부부를 찾아온다. 『캐나다의 대학들은 입학은 쉬워도 졸업이 어려워 몇 년 전 토론토대 어느 과 에는 한국학생 49명이 입학했으나 7명만 졸업장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한국에서 전문대조차 자신 없는 자녀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 오면 교육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줄 알고 이민 수속을 도와 달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씨 부부는 『이렇듯 무작정 교육 이민을 온 교포 청소년이 부모들의 「별난 교육열」 부담에 못 배겨 월남·중국계 문제 청소년들과 어울리다 탈선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했다.
심지어 도피성 유학생 중에는 유학 생활의 갈등과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차마 부모에게는 귀국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숨어 지내는 바람에 영문 모르는 부모는 꼬박꼬박 자녀 유학 비를 부쳐오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토론토·밴쿠버·에드먼턴 시 등 캐나다 각지에 살고 있는 한국 교포는 약 6만 명. 그러나 이들 중 외교관·상사 주재원·교수·기술 용역 단·일부 실제 투자 이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포들이 『자녀 교육 때문에 이민 왔다』고 말하고 있다.
철저한 점수만으로 서열 화하는 비뚤어진 한국의 대입제도가 이 같은 「교육이민」을 낳은 셈이다.
김씨 부부는 캐나다가 한국대입에 자신이 없거나 실패한 학생들의 「최상의 구원지」로 잘못 알고 있는 것 갈다고 들려줬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캐나다에 오면 곧 예비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 대학 진학이 비교적 쉽지만 고교 재학 중에 올 경우 스무 살이 넘도록 예비 대학에서 맴돌기 일쑤지요.』 몬트리올 대 유전공학 교수인 정영섭 박사 (52)는 『그럼에도 무분별한 교육 이민으로 무려 7∼8년씩 어학 과정에 매 달려 있는 「만년 대기학생」이 늘어나 큰 문제』라고 했다. <캐나다=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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