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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영혼의 비밀 풀고 싶어 신비로운 자아와 시를 사랑한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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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생전의 최명희씨(左)와 이금림씨(右)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최명희 문학관에서 관람객들이 최씨의 편지를 살펴보고 있다.

작가 인생 대부분을 대하소설 '혼불' 집필에 매달렸던 작가 최명희(1947~98)씨. 그녀가 75년 6월19일 무려 2m가 넘게 작성한 장문의 편지가 공개됐다. 수신인은 평생 친구로 지낸 방송작가 이금림씨였다.

새벽 4시까지 밤을 꼬박 새워 썼다는 이 편지에서 최씨는 "내가 어떻게 살고 싶어하며,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나는 일평생, 영혼의 숙제와 정신의 비밀을 푸는 데 힘을 다할 것이다"며 자신의 인생을 문학에 걸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최명희문학관은 이 같은 내용이 적힌 편지를 이씨로부터 기증받아 최근 공개했다. 한지에 만편필로 내려 쓴 이 편지의 크기는 가로 2m10㎝에 세로 30㎝.

최씨와 이씨는 고향(남원)이 같은데다 전주사범 병설중학교 동창으로 함께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둘은 일기를 쓰듯이 매주 두,세차례씩 편지나 엽서를 주고 받으며 평생 깊은 교감을 나눴다.

이 편지에서도 최씨는 "너는 나를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지켜 주고,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언니같기도 하고 스승같기도 한 친구로서 내 생애의 마지막 자리까지 함께 갈 것을 생각하면 눈물겹다"며 이씨에게 깊은 애정과 신뢰를 보냈다.

최씨는 이 편지를 쓴 5년 뒤인 80년 '쓰러지는 빛'이라는 단편소설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81년부터 17년간에 걸쳐 10권짜리 대하소설 '혼불'을 완성했다. 일제 강점기 3대에 걸친 사대부 집 여인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비평가들로부터 "한국인들의 삶의 원형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씨는 KBS 드라마 '당신이 그리워질 때'와 SBS '은실이' 등을 집필한 인기 방송작가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서울 보성여고 교사였던 최씨는 "소박하게 출발해 위대하게 거두고 싶고 소규모의 문제나 삶은 원하지 않는다"며 "나는 신비로운 자아를 사랑하며, 시를 사랑하고 철학을 존중한다. 또 사치스러운 귀족풍 살롱을 좋아한다. 도회지의 생리가 낯익고 편안하다"며 예비 소설가로서의 인생관과 꿈을 보여줬다.

최명희문학관의 최기우 기획실장은 "최 선생의 편지에는 인생에 대한 고결한 자세, 철학적 물음 등이 문학적 향취와 함께 배어 있어 몇번을 읽어도 의미가 새롭다"고 말했다.

문학관은 전북 전주시가 최씨의 학창시절 흔적이 남아 있는 풍남동 한옥마을에 대지 500여평, 건평 200평 규모로 건립, 올 4월 문을 열었다.

소설가 최씨는 남원에서 출생해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전주 기전여고.서울 보성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81년부터 '혼불'을 17년간 집필, 96년에 완성했다. 87년 제11회 단재상, 97년 세종문화상, 98년에는 호암예술상 받았으며 51세가 되던 98년12월 난소암으로 세상을 떴다.

장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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