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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괴작’ 조롱받던 독학 화가, 피카소의 영웅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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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호 22면

[영감의 원천] 앙리 루소의 정글 그림

1 앙리 루소의 ‘꿈’(1910), 캔버스에 유채, 204.5x298.5㎝. [사진 뉴욕 현대미술관 MoMA]

1 앙리 루소의 ‘꿈’(1910), 캔버스에 유채, 204.5x298.5㎝. [사진 뉴욕 현대미술관 MoMA]

“우리는 이국적이면서 무섭지 않고 색이 다채로운 정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앙리 루소를 참고하는 게 안성맞춤이었죠. 그는 정글을 아이와 같은 눈으로 그렸으니까요. 그는 스스로를 사실주의 화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한 번도 정글에 가본 적이 없었지요. 그의 그림이 나이브(naïve·천진난만)한 건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세관원 출신, 마흔 넘어서 데뷔 #정글 한 번도 안 가고 그린 그림 #혁신 추구 전위 예술가들 호평 #50가지 풍부한 녹색 향연 매력적 #“자연 그리는 일만큼 행복한 것 없다”

미국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2005)의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한 말이다. 뉴욕 동물원에 살던 네 마리 동물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에 불시착해서 벌이는 소동인데, ‘뉴요커’ 동물들이 낯선 정글로 들어가는 장면(사진3)이 특히 인상적이다. 배경에 빽빽한 온갖 나무와 풀들이 다 같은 녹색이 아니고 청색이 감도는 비리디언부터 황색이 감도는 올리브그린까지 다채롭다. 잎사귀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리드미컬하게 펼쳐져 있다. 이 발랄한 정글 장면은 세관원 출신으로 독학해서 ‘나이브 아트(naïve art)의 대가’가 된 앙리 루소(1844~1910)의 유산이다.

루소의 ‘꿈’(사진1)과 ‘뱀을 부리는 사람’을 보면 일단 그 풍부한 녹색의 다양함에 감탄하게 된다. ‘꿈’ 하나에 사용된 녹색의 종류만 50가지에 달한다고 한다. 각자 다른 녹색을 부여받은 이 식물들은 모두 자신이 주인공인양 꽃과 잎을 빳빳이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만약 루소가 소원대로 정규 미술학교를 나왔다면 절대 이렇게 그리지 말라고 교사들이 가르쳤으리라. 하지만 루소의 그림에서는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보는 식물들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답게 합창을 한다. 그가 색채와 형태의 음악적 배열에 직관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미국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2005)의 한 장면. [사진 스크린 캡처]

미국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2005)의 한 장면. [사진 스크린 캡처]

루소의 그림에 당대 사람들은 대부분 비웃었지만, 서양미술의 보수적 전통을 깨고자 한 파블로 피카소(1881~1973) 같은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열광했다. 그들 덕분에 말년에 비로소 빛을 본 루소는 그 후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두아니에 루소(Le Douanier Rousseau·세관원 루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의 인생 자체가 영감의 원천이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마흔을 넘긴 나이에 화가로 데뷔해 투잡을 뛰고, 거의 쉰이 다 됐을 때 비로소 전업 화가가 되어 인생 제2막을 열었지만 계속 조롱만 받다가, 예순이 넘어 비로소 아방가르드 예술의 영웅이 된 그의 인생 말이다.

루소는 스물이 되기 전에 군대에 갔는데, 이때 멕시코에 파병돼 갖가지 모험을 했다고 훗날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말하고 다녔다. 루소가 말년에 얻은 팬들 중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이 말을 믿고 루소에게 즉흥시를 바칠 때 “그대의 그림은 멕시코에서 본 광경을 담고 있다-초록의 바나나 잎 사이로 보이는 붉은 태양”이라고 읊었다.

하지만 루소가 멕시코에 갔다는 건 순 허풍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지방에서 군 생활을 했고, 한 번도 고국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입대한 데에는 더 남루한 진실이 있었다. 자신이 일하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푼돈을 훔치다 걸린 뒤 감옥살이를 줄이기 위해 군대에 들어갔던 것이다.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에도 영향

루소는 프랑스 북부의 소도시 라발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 부친이 투기로 전 재산을 날리는 바람에 넉넉했던 집이 몰락했고, 그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됐다. 이것이 루소에게 평생의 깊은 한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멕시코 이야기 같은 환상과 허풍으로 도피하곤 했을 것이다.

사실 루소는 ‘나이브’라는 단어만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람이었다. 대체로 순진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그 순진한 얼굴로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미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것과 가난에 콤플렉스가 많았으며, 가끔 그게 실생활과 그림에서 폭력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의 정글 그림에는 무심하게 평화로운 식물들 사이에서 맹수가 피를 뿌리며 먹이를 물어뜯거나 사람을 공격하는 등의 은근 잔혹한 장면도 많다.

하지만 루소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연과 그림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진지함이었다. 20대 중반에 제대해 결혼을 하고 파리 센 강 부두 세관에 하급 공무원으로 취직하면서 박봉이나마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상사의 허락을 얻어 직장에서 남는 시간에 세관 주변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월급쟁이라면 직장 주변을 그리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으련만, 그는 꼼꼼히 관찰해 평화로운 풍경으로 그려냈다. “자연을 관찰해 그 관찰한 것을 그리는 일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소의 ‘카니발 저녁’(1886), 캔버스에 유채, 106.9x89.3㎝. [사진 필라델피아 미술관]

루소의 ‘카니발 저녁’(1886), 캔버스에 유채, 106.9x89.3㎝. [사진 필라델피아 미술관]

그러던 그가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흔이 넘은 1886년 앙데팡당(Indépendants) 전시에 참가하면서였다. 이 전시는 왕립 아카데미의 정기 전시인 살롱의 보수적 기준에 반항하는 의미를 담아 조르주 쇠라 등 젊은 화가들이 조직한 것으로, 누구든 약간의 참가비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파격적인 작품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루소의 ‘카니발 저녁’(사진2)은 특히 화제가 됐다. 어린애 그림 같다고 모두 웃어댔던 것이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소박한 형태와 세련된 색채의 조합이 무척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그 후 루소는 앙데팡당 전에 꾸준히 작품을 냈다. 그의 그림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좋은 쪽이 아니었다. 너무 못 만들어 ‘괴작’ 칭호를 받은 영화가 수많은 리뷰를 끌어모으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것이 못마땅했던 앙데팡당 관계자 중에는 루소의 출품을 금지시키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앙데팡당의 오픈마인드를 훼손하게 된다는 반박 덕분에 루소는 계속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젊은 전위 예술가 중에 그의 작품이 혁신적이라고 호평을 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여기에 용기를 얻어 루소는 쉰이 가까워진 1893년에 마침내 세관에서 조기 은퇴해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1891년 처음 시도했고 예순이 된 1900년대 중반부터 집중적으로 그린 정글 그림은 특히 전위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식물원·박물관서 영감 얻어 그림 그려

그런데 파리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루소는 ‘동물의 왕국’ TV 다큐멘터리도 없던 시절에 무엇을 보고 정글 그림을 그렸을까. 그는 동물 박제와 열대식물 온실이 있는 파리 식물원과 파리 자연사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비록 박제가 되거나 화분에 담긴 동식물이었지만, 루소는 그들에게 혼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자신이 화폭에 옮겨 담는다고 생각했다. 마침 원시미술과 아프리카 미술 등에서 활로를 찾던 전위 예술가들은 그런 루소를 ‘파리의 천진난만한 원시인 예술가’로 받아들였다.

명성을 갈구하던 루소는 기꺼이 그들의 숭배에 응했지만, 그 숭배의 맥락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1908년 피카소가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루소를 위해 파티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루소는 피카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둘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입니다. 선생은 이집트 스타일에서 최고이고 나는 현대 스타일에서 최고죠.”

피카소를 비롯해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게 대체 뭔 소리지?’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나이브 아트 화가다운 천진난만한 헛소리였을까, 아니면 ‘너희는 나를 영감을 주는 원시인쯤으로 생각하지만 나도 모던 아티스트다!’라는 의뭉스러운 항변이었을까.

아무튼 루소는 자신을 지지하는 젊은 예술가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대작 ‘꿈’을 그려서 1910년 앙데팡당 전에 발표했다. 그해 가을 다리의 상처가 덧나 합병증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루소 최후의 그림이 ‘꿈’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삶은 가난·콤플렉스·허언·남들의 비웃음으로 얼룩졌지만, 그는 그럼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젊은 전위 예술가들의 눈에 띄지 않고 무명으로 일생을 마감했어도 그는 후회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꿈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 자체가 꿈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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